고등학생 때, 서울 서대문 인근의 종합학원에 잠시 다녔다. 친구를 따라가서 수학 단과 강의를 한 번 듣고는 왠지 이 학원이라면 나를 대학에 보내줄 것 같다는 그런 마음이 되었으나, 두세 달 다니다가 그만두었다. 그때 배웠던 삼각함수나 미적분 같은 것은 이제는 그 기호조차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근처에 있던 오락실과 떡볶이를 팔던 작은 포장마차만큼은 선명하다. 언제부턴가 친구와 함께 거기에는 꼭 들렀던 것이다. 전 오락실, 후 떡볶이, 이것이 우리의 약속이었다.
어느 겨울날 수업이 끝나고 친구와 함께 학원 앞 포장마차에서 떡볶이를 먹었다. 하교 후에 바로 학원으로 갔으니까 둘 다 교복을 입은 채였다. 그때 우리의 대화는 절반은 한숨이었던 듯하다. 하, 우리 어쩌냐. 하, 그러게 망했다. 하는 말들을 주고받으면서 1인분에 천 원 하는 떡볶이를 먹었다. 그때 우리 옆으로 교복을 입은 여중생 둘이 들어왔다. 두 사람은 떡볶이 1인분을 주문했고 그것을 나누어 먹었다. 그 모습을 보던 나는 왜 그랬는지, 나와 친구의 떡볶이를 계산하면서 주인에게 말했다. "여기 떡볶이도 같이 계산해 주세요.“
내가 오락실에서 친구와 게임해서 졌으니까 그의 떡볶이를 사는 건 맞았으나 옆 테이블의 것까지 계산하는 건 그럴 이유가 없는 일이었다. 친구가 나에게 미쳤느냐고 작게 말했고 중학생들은 어, 어, 하다가 고맙습니다, 하고 말했다. 나는 잘 먹으라거나 하는 말 없이 거기에서 나왔다. 사실 내가 그래 놓고도 부끄러웠던 것이다. 친구가 왜 그랬느냐고 물어서 그에게 답했다. "아니, 그냥, 둘이서 1인분 시키길래. 쟤들도 1인분씩 먹고 싶을 거 아냐.“
아마도 그것이 내가 완벽한 타인에게 베푼 첫 번째 호의였는지도 모르겠다. 오랜만에 이 기억이 떠오른 것은 내가 아는 K가 겪었다고 하는 다음의 일화 때문이다.
K가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계산을 하려고 할 때, 식당 주인이 다른 사람의 카드로 K의 밥값을 결제하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환불하고 다시 결제해야 했으나 기계는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결제를 '당한' 그가 말했다고 한다. "그럼 제가 이분 것 사면 되죠. 그러면 기분 좋지." 그 말을 들은 K는 기계가 되면 자신의 카드로 그와 자신의 밥값을 함께 결제하겠다고 했으나 결국 조금 기다려서 각자의 밥값을 결제했다고 한다.
나의 카드로 다른 사람의 밥값이 결제되었을 때, 흔쾌히 이 사람의 밥을 내가 사면 나도 기분이 좋다, 라고 말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가진 사람이 얼마나 될까. 나는 별로 자신이 없다. 얼굴을 찌푸리며 기다리는 게 고작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그 한마디는 식당 주인의 당황스러움을, K의 난감함을, 모두 사람을 향한 존중으로 바꾸었다. K는 그에게 말했다고 한다. "선생님의 좋은 마음 덕분에 제가 진짜 좋은 하루가 될 것 같아요." 그는 K의 손을 잡으며 답했다고 한다. "그 말이 오히려 뭉클합니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하다고 사과하는 식당 주인에게는 덕분에 좋은 말을 듣고 기분 좋게 잘 먹었다고 인사하고 함께 나왔다고 한다.
사람의 마음을 살피는 한 마디, 완벽한 타인의 처지가 되어 그들을 상상해 보는 마음의 여유, 이런 것이 우리가 가져야 할 다정함이 아닐까. 나도 그와 K의 손을 잡아주고프다. 내가 그날 샀던 떡볶이는 여전히 부끄럽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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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섭 사회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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