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이슬의 슬기로운 씨네리뷰]
천우희·이혜영 주연
임신과 사회적 욕망 사이
고통받는 여성 서사 그려
용두사미 결말 아쉬워
[아시아경제 이이슬 기자] 여성이 여성의 이야기를 하고, 사건의 중심에 서고 극을 이끌어가는 영화가 잘 됐으면 좋겠다. 잘 만들어져서 많은 관객의 선택을 받고 다시 제작되면 좋겠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여성 영화'라는 말이 사라지는 날이 오길 바란다. 그런 의미에서 '앵커'(감독 정지연)는 꽤 반가웠다. 천우희·이혜영이 우리의 이야기를 해줄거라 기대했다.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렸다.
바쁘게 돌아가는 방송국. 9시 뉴스 앵커 정세라(천우희 분)에게 한통의 전화가 걸려온다. "아이가 살해됐어요. 범인이 저도 곧 죽이러 올 거예요. 저희 집으로 와주세요. 제 죽음이 정세라 앵커의 입을 통해 보도되면 기쁠 거 같아요." 과도한 팬심에 흔한 장난전화가 아닐까 고개를 갸웃한다. 시계를 보니 생방송 5분 전, 세라는 황급히 전화를 끊고 앵커룸으로 향한다.
완벽에 가까운 아나운싱을 구사하던 세라는 멘트를 삐끗한다. 조금 전 걸려온 장난전화가 계속 맴돌아 찝찝하다. 집으로 들어온 세라는 엄마 소정(이혜영 분)에게 이를 털어놓고, 소정은 '네가 진짜 앵커가 될 기회'라고 조언한다. 아나운서로 입사해 앵커가 된 세라는 전직 3개월차 기자다. 곧 개편도 다가오고 진짜 앵커로 인정받고 싶은 마음에 제보자의 집으로 차를 몬다.
그곳에서 세라는 제보자 미소와 그의 딸의 시체를 목격하고, 자신이 취재한 사건을 직접 보도한다. 회사에서 능력을 인정받아 단독 코너인 '앵커의 눈'까지 진행하는 기회가 주어진다. 그러나 세라는 그날 이후 미소의 마지막 모습이 자꾸 떠올라 괴로워한다. 애써 자신을 다잡으며 추가 취재차 사건 현장으로 향하는데 그곳에서 미소의 주치의였던 정신과 의사 인호(신하균 분)를 만난다.
세라는 최면전문의 인호를 향한 의심을 거둘 수 없다. 알고보니 그가 상담 도중 환자가 자살한 사건에 연루됐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 사람이 제 딸을 죽였다고요." 생전 제보자 미소의 외침이 이명처럼 귀에 맴돌고, 결국 세라는 녹음기를 품고 직접 최면치료를 받기로 한다.
'앵커'는 고통받는 여성 서사를 그린 영화다. 사회적인 존재로서 마주하는 갈등과 개인적인 욕망 사이에서 온전히 여성의 이야기를 한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사회 구성원으로 추구하는 목표가, 욕망이 출산으로 인해 가로막히고, 이를 거스르면서 벗어날 수 없는 굴레를 극단적인 상황을 통해 비춘다.
이러한 소재를 스릴러로 담아낸 것은 인상적이다. 임신을 축복이 아닌 여성들의 무덤으로 그린 스토리도 흥미롭다. 이는 그간 미디어에서 클리셰로 소비돼온 것과 차이를 띈다. 꽤 흥미로운 스토리다.
천우희는 역시 천우희다. 실수를 용납 못 하는 완벽주의 앵커의 모습과 환영에 시달리며 이성을 잃어가고 예민하게 변해가는 모습을 섬세하게 표현했다. 이혜영은 등장과 동시에 극의 공기를 바꿔버린다. 관록의 연기로 극을 지탱한다. 신하균의 에너지도 눈에 띈다. 그가 등장하면서 극은 활력을 띄고, 미스터리가 배가된다. 이처럼 세 배우는 삼각 구도를 이루며 유연하게 연기 변주를 펼친다.
용두사미 결말은 아쉽다. 극 초반 스릴러 공식을 차근차근 밟아가며 시선을 사로잡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다소 예측 가능한 결말이 그려진다. 영화는 몹시 친절하다. 과도한 친절함은 콘텐츠의 범람 속 매력적인 지점은 아니다. 조명, 앵글, 복선 등 예측 가능한 장치들이 반복되면서 재미가 반감된다. 극 후반 낡디 낡은, 2000년대 초반 실종된 설정이 고개를 들면서 개입되는 신파도 아쉽다. 연출적 노련함이 추가됐다면 더 좋았을 '앵커'다. 러닝타임 111분. 15세 이상 관람가. 4월20일 개봉.
이이슬 기자 ssmoly6@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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