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직사회의 '영혼론', 독일 사회학자 막스 베버부터 시작
문재인 대통령이 22일 “정권 뜻에 맞추는 영혼 없는 공직자가 돼선 안 된다”고 말하면서 공직사회의 오랜 화두인 ‘영혼 없는 공무원’이 회자되고 있다.
문 대통령은 이날 오후 정부과천청사에서 열린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방송통신위원회 업무보고 자리에서 “국정 농단 사태를 겪으면서 국민들은 새로운 공직자상을 요구하게 됐다. 공직자는 국민을 위한 봉사자이지 정권에 충성하는 사람이 아니다”라며 이같이 말했다.
새 정부 출범 이후 첫 부처 업무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문 대통령이 공직사회의 적폐청산을 주문한 것으로 해석된다. ‘영혼 없는 공무원’은 공직사회의 적폐를 드러내는 표현이다. 이는 정권에 따라 입장을 바꾸고 정권에 맹목적으로 충성하는 공무원들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공직사회의 ‘영혼론’을 가장 먼저 제기한 건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다. 베버는 ‘프로테스탄티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관료제는 개인 감정을 갖지 않는다”며 “이상적인 관료는 영혼이 없다”고 했다. 이는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과 전문성을 강조한 표현이었다.
하지만 미국의 행정학자 랄프 험멜에 의해 ‘영혼 없는 공무원’의 의미는 바뀌었다. 험멜은 1977년에 펴낸 ‘관료적 경험’에서 관료제를 비판하면서 “공무원은 생김새가 인간과 비슷해도 머리와 영혼이 없는 존재”라고 언급했다.
우리나라에 이 표현이 처음 등장한 것은 2008년 1월 이명박 정부 출범을 앞둔 인수위원회 시절이다. 당시 인수위의 국정홍보처 업무보고에서 인수위원들은 노무현 정부의 취재 선진화 방안을 지적하며 홍보처 폐지를 강조했다. 이에 한 홍보처 간부는 “우리는 영혼이 없는 공무원들이다. 대통령 중심제에선 어쩔 수 없다”고 하소연했다.
해당 발언 이후 ‘영혼 없는 공무원’은 일종의 관용구처럼 회자돼 왔다. 이는 대중이 소신 없는 공무원을 비꼬거나 공무원이 스스로를 자기 합리화하는 도구가 돼왔다. 실제 사례도 수두룩하다.
이명박 정부의 윤증현 당시 기획재정부 장관은 2010년 국회에서 “중소기업 감세안을 반대하던 기재부가 왜 갑자기 찬성으로 돌아섰느냐”는 질문을 받고 “그래서 공무원을 혼이 없다고 하지 않느냐”고 답했다.
박근혜 정부에서는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를 계기로 ‘영혼 없는 공무원’이 도마에 올랐다.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 김종 전 문화체육관광부 2차관 등 수많은 공무원들이 위법한 지시를 따랐다. 이를 두고 위에서 시키면 무조건 따르는 ‘영혼 없는 공무원’들의 행태가 국정농단 사태의 원인이 됐다는 지적이 나왔다.
이런 폐단을 막기 위해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부당한 지시를 거부하는 조직으로 만들겠다고 선언한 바 있다. 도 장관은 지난 6월 취임식에서 “영혼이 있는 공무원이 돼라”며 “저는 여러분에게 부당한 명령을 내리지 않겠다”고 말했다. 또 “나의 역할은 부당한 지시를 하지 않고, 위로부터의 부당한 지시를 막는 것이라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한편 국회에서는 ‘영혼 없는 공무원 방지법’이 발의된 바 있다. 지난 1월 기동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대표발의로 민주당과 정의당 의원 38명은 위법한 직무상 명령은 거부해야 한다는 내용의 국가공무원법 개정안을 내놨다.
개정안은 ‘공무원의 복종 의무’를 규정한 57조에 ‘직무상 명령이 위법한 경우 복종을 거부하여야 한다’는 단서를 추가하고 이 같은 복종 거부로 인해 어떠한 인사상 불이익 처분을 받지 않는다는 점을 명시했다. 현행 57조는 소속 상관의 직무상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는 ‘복종 의무’만을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 소관 상임위인 안전행정위원회는 법안 심사를 미루고 있는 상태다.
아시아경제 티잼 김경은 기자 silver@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