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김형민 기자] 한국 축구 역사에 '참사'는 여러번 있다.
참사에는 다 이유가 있다. 반성의 계기가 된다. 참사는 '한국 축구는 지금 어디에 와 있는가'를 항상 물었다. 이번 '도하 참사'도 그렇다. 카타르 도하에서 당한 충격패는 비단 울리 슈틸리케 감독(62) 거취로 직결되는 문제가 아닌 우리 문제다. 슈틸리케 감독의 미래에 관계 없이. '우리는 어디에 와 있나'도 물어봐야 한다.
카타르 도하에서 우리는 무엇을 봤을까. 축구대표팀은 14일(한국시간) 카타르 도하의 자심 빈 하마드 스타디움에서 열린 러시아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 A조리그 원정경기에서 카타르에 2-3으로 졌다. 전반 25분과 후반 6분 연속골을 내준 다음 후반 16분 기성용(28ㆍ스완지시티), 25분 황희찬(21ㆍFC레드불 잘츠부르크)의 골로 동점을 이루었지만 30분 하산 알 하이도스(27ㆍ알 사드)에게 결승골을 내줬다. 우리 대표팀이 카타르에게 지기는 지난 1984년 12월 아시안컵(0-1) 이후 33년 만의 일이다.
대표팀은 4승1무3패(승점13)로 조 2위 자리를 지켰다. 3위 우즈베키스탄이 하루 전 이란에 0-2로 져 4승4패(승점12)에 묶인 덕이다. 카타르는 2승1무5패(승점7)를 기록했다. 이란이 13일 본선진출을 확정, 대표팀은 반드시 2위를 해야 러시아로 직행할 수 있다. 두 경기가 남았다. 오는 8월31일 이란과 홈경기, 9월5일 우즈베키스탄과 원정경기를 한다. 러시아로 가는 길은 열려 있지만 험난하다. 지금의 실력으로 목표를 이룰 수 있을지 의문이다. 최종예선 3패는 대표팀에 유례가 없는 일이다.
가장 큰 문제는 수비. 대표팀의 수비력은 국제무대에서 경쟁할 수준이 못된다. 조직력은 둘째 치고 선수들의 기량이 역대 대표팀 가운데 최악이다. 공격수와 일대일 대결에서 이겨내지 못할 뿐 아니라 공간을 파고드는 상대를 파악하지 못한다.
결승골을 내주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곽태휘(36ㆍ서울)는 공간을 파고드는 알 하이도스를 놓쳤고, 침투패스를 끊지도 못했으며 태클도 실패했다. 첫 실점으로 연결된 프리킥은 최철순(30ㆍ전북)이 골 정면 위험지역에서 반칙을 한 결과다. 두 번째 골을 내줄 때는 김진수(25ㆍ전북)가 뒤로 돌아 들어가는 아크람 아피프(21ㆍ스포르팅 히혼)를 놓쳤다. 공에 시선을 빼앗겨 사람을 보지 못했다.
수비는 성인대표팀 만의 문제가 아니다. 20세이하를 비롯해 연령별 대표팀이 모두 갖고 있는 문제다. 세대가 바뀌면서 나타난 문제들. 한국 축구가 국제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둘 때는 늘 뛰어난 수비수들의 활약이 있었다. 1970년 방콕아시안게임 우승은 김호-김정남 콤비의 헌신 위에서 이회택과 같은 스타 플레이어들이 맡은 임무를 완수해 얻은 결과였다. 2002년 월드컵 때는 홍명보, 최진철, 유상철, 김태영이 버티지 않았던가.
일부 일선 지도자들은 "최근 좋은 수비수들을 찾기 힘들다"고 한다. 여러 이유가 달린다. 수비보다 패스하는 수비수가 많아진 점, 미드필더와 공격수를 선호하는 유소년 선수들의 포지션 분포 등이 있다. 곽태휘는 분명 좋은 능력을 지녔지만 그가 앞으로 대표팀에서 얼마나 뛸 수 있나. 카타르를 상대로 불안한 수비는 새롭고 좋은 수비수들이 신선함을 주지 못한 현 문제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듯했다.
한국은 카타르를 상대로 개인간 승부에서도 사실상 패했다. 카타르 선수들은 개인기로 한국 선수들을 우왕좌왕하게 만들었다. 축구는 팀의 스포츠다. 하지만 각각 필드플레이어 열 명 간, 개인 대결들이 모여 전체 경기를 완성한다. 불과 5~6년 전 한국 선수들의 개인기량은 아시아 최고였지만 카타르와의 경기는 그렇다고 말하기 어렵다. 선수들 각자의 개인 기량에도 문제가 있었다.
공을 제대로 소유하지 못했다. 여론은 울리 슈틸리케 감독(62)의 공을 점유하는 전술을 줄곧 비판해 왔다. 그러나 선수들의 역량이 상대에 못 미치면 전술적 선택이 위력을 발휘하기 어렵다. 대표팀은 수비형 미드필더 기성용을 전진배치하면 공격력이 강해지는 대신 수비가 약해지는 약점이 있다. 대표팀에는 기성용의 자리를 대신 맡아 수비를 보호하고 패스를 전개할 선수가 없다. 한국영(27ㆍ알 가라파)이 주로 대역을 맡지만 기성용이 있을 때만큼 안정적이지 않다.
카타르가 스리백을 잘 운영했다는 점을 들어 우리 대표 팀의 공격력을 비판하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축구는 기회가 올 때마다 골을 넣을 수 있는 종목이 아니다. 수비가 세 골을 내주었는데 공격에서 네 골을 넣어야 한다면 지나치게 가혹한 미션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이 주장은 슈틸리케 감독이 이라크와 평가전을 할 때 스리백을 실험한 일을 끝까지 물고 늘어지려는 태도로 보인다.
공격도 고민이다. 대표팀은 줄곧 득점력 부족을 지적받아왔다. 그러나 원정경기에서 두 골을 넣어 체면치레는 했다. 더 넣을 수도 있었다. 황희찬이 전반 8분 김진수의 스로인을 침착하게 받아서 슈팅을 했거나 이근호(32ㆍ강원)가 전반 41분 골키퍼와 마주선 상태에서 날린 왼발슛이 골안으로 굴러 들어갔다면 결과도 달라졌을 것이다.
이청용(29·크리스탈팰리스)은 지난 2010년 남아공월드컵에서 한국 대표팀의 샛별, '쌍용(기성용과 이청용)'으로 각광 받던 그때의 모습이 아니다. 지동원과 구자철(28·아우크스부르크)은 지난 2011년 아시아축구연맹(AFC) 아시안컵 때와 다르다. 대표팀이 새로워지려면 다른 카드가 필요하다. 희망을 봤다면 후반 25분 황일수(30)가 헤딩 패스하고 황희찬이 득점한 장면에서가 아닐까.
대표팀과 슈틸리케 감독을 동정할 부분도 있다. 우선 전반 30분 손흥민(25ㆍ토트넘 핫스퍼)이 부상으로 빠진 점을 들 수 있다. 손흥민은 공중 볼을 다투다 밀려 넘어졌다. 이때 오른팔로 그라운드를 짚었는데 골절이 될만큼 강한 충격을 받았다. 손흥민은 누워서 고통을 호소했고 곧 이근호와 교체, 아웃됐다. 하지만 손흥민이 나간 뒤에도 이길 기회는 많았다.
슈틸리케 감독은 경기 후 기자회견에서 "공을 제대로 간수하지 못해 어렵게 경기했다. 협력 수비도 되지 않았다. 나의 거취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겠다. 내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다"라고 했다. 주장 기성용은 "모든 부분에서 부족했다. 보완해야 할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다음 경기에 집중하겠다"고 다짐했다. 지금 상황을 슈틸리케를 해임하면 타개할 수 있을지, 선수들이 집중만 하면 이길 수 있는지, 어느 쪽도 확신하기 어렵다.
김형민 기자 khm193@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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