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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에 다림이를 다시 만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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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프리즌'의 교도소 절대권력 재소자役 한석규
"눈빛 좋았지만 연기 점수 65점…'한석규' 화술과 싸움 힘들어"
"'8월의 크리스마스' 정원 다시 그린다면 연기하지 않을 것"

"8월에 다림이를 다시 만난다면..." 배우 한석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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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이종길 기자]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목욕탕. 넓은 물탕을 독차지한 재소자가 모서리에 걸터앉아 맥주를 들이킨다. 지고기양(趾高氣揚)하며 거드름을 피우지만 어떤 교도관도 건드리지 못한다. 교도소의 권력실세이자 잔인무도한 냉혈한이다. "넌 이 세상이 저절로 굴러가는 것 같지? 세상 굴리는 놈들 따로 있어." 세상을 통달한 듯한 목소리는 깡패나 양아치와 거리가 멀다. 욕설을 늘어놓아도 엄숙하고 무게가 있다. 영화 '프리즌'에서 배우 한석규(53)가 그린 정익호. 그동안 맡은 배역 가운데 가장 악랄하지만 그리 과하지 않다. 말투를 반 박자 빨리하고 목소리 톤을 살짝 올렸을 뿐이다.

한석규를 17일 서울 삼청동 카페 라디오M에서 만났다. 그는 묻지도 않았는데 자신의 연기를 자책했다. 적정선 안에서 다양한 변화를 꾀했지만 특유 화술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을 못마땅해했다. "어느 순간 '한석규'의 화술이 튀어나오는 순간이 있어요. 저도 모르게 나오는 버릇이죠. 생각 이상의 스트레스예요. 고치기가 쉽지 않죠." 한석규는 고급 세단을 운전하듯 중저음의 목소리로 느릿느릿 말한다. 어린 시절 성악가를 꿈꿨다. 연습을 통해 다져진 발성과 성우로 활동하며 훈련된 정확한 발음으로 일찍이 충무로를 매료시켰다.


"8월에 다림이를 다시 만난다면..." 영화 '프리즌' 스틸 컷

그는 배우로서 정형화된 틀에 갇히기를 거부한다. 다채로운 배역을 맡으며 자신의 세계관을 넓혀간다. 악역에도 여러 번 도전했다. '구타유발자들(2006년)'의 문재와 '눈에는 눈 이에는 이(2008년)'의 백성찬 등 불량 형사나 깡패였다. 평범한 얼굴 덕에 선과 악을 자유자재로 넘나들었다. 하지만 악역을 맡으면서 강인한 인상을 남긴 적은 많지 않다. 대부분의 작품에서 겉으로 표현되는 것 이외에 확 터지지 않는 무언가를 남겨놓았다. 굵은 붓으로 크게 한 획을 그으면 그만일 수도 있지만, 자신만의 적정선을 그려놓고 그 안에서만 생동감을 부여했다. 그래서 연기가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았다.


한석규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연기는 연기를 안 하는 것 같은 연기다. 관객이 연기인 것을 눈치를 채지 못할 만큼 자연스러워야 한다. 그래서 과잉보다 조금 부족한 것이 오히려 낫다고 생각한다. "'내 연기가 다 가짜구나'라는 생각이 들 때 가장 힘들어요. 가짜만 잡고 그게 진짜인 것처럼 발버둥 치는구나 싶죠. 상대 배우의 연기가 가짜 같이 보일 때도 마찬가지에요. 가짜로 리액션을 해야 하니 미치고 펄쩍 뛸 노릇이죠. 연기가 구차해지는 것은 한순간이에요." 악역을 맡을 때 이런 고민은 더 커진다. "드라마 '낭만닥터 김사부'의 김사부 같은 배역은 스스로 거부감 없이 다가갈 수 있는, 내 기본적인 걸 그대로 써먹어도 되는 인물이에요. 익호는 정반대죠. 많이 불편하겠다는 공포심부터 들었어요. 사투리처럼 배워서 하긴 하지만 내 말이 아닌 거죠. 그래도 '에라 모르겠다' 했어요. 도전하고 싶은 마음에 앞서 일이니까요."


"8월에 다림이를 다시 만난다면..." 영화 '프리즌' 스틸 컷


그는 프리즌에 출연한 자신의 연기 점수를 65점이라고 했다. 화술 등에 만족하지 않지만, 맹수이면서도 생존 본능만 남은 수놈 하이에나의 정서를 얼굴에 제법 그려냈다는 자평이다. "눈빛만큼은 볼만 했던 것 같아요. 그동안 악역으로 나온 작품에서는 뭔가 텅 비어있는 느낌이 강했거든요. 이번에는 그렇지 않았어요. 악행에 정신이 팔리지도 않았고요. 그 지점이 나름 함정이에요. 슬픈 신에서 제가 슬프게 연기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아요. 그렇게 표현해서 관객의 감성을 흔드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요."


근래 대중이 기대하는 한석규의 모습은 낭만닥터 김사부의 김사부나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의 이도다. 모두 중저음의 목소리, 차분한 말투 등과 잘 어우러져 높은 인기를 끌었다. 대중을 사로잡은 TV 광고 역시 이런 장점을 극대화한 한 이동통신사의 산사편이다. 스님과 함께 대나무 숲을 걷는 모습을 길게 보여주는데, 나비를 깨우는 벨소리에 한석규가 서둘러 핸드폰을 끈다. 이어지는 내레이션에서 그는 따뜻한 목소리로 "또 다른 세상을 만날 땐 잠시 꺼두셔도 좋습니다"라고 말한다. 이 광고는 구조조정으로 실업자가 쏟아져 나오고 가정이 붕괴되던 1998년에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며 반향을 일으켰다.


"8월에 다림이를 다시 만난다면..."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 스틸 컷


한석규는 대중이 자신에게 원하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다양한 배역을 통해 자신의 연기 폭을 넓히는 것을 우선으로 생각한다. 선별 기준은 인물에 대한 호기심이다. "특정한 인물에 대한 궁금함이 저를 붙잡는 것 같아요. 연기를 할 때마다 이 인물이 어떤 결말에 다다를지를 자주 생각하거든요. 배우로서 욕심일 수 있고 목표일 수도 있어요.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흥분되죠." 그는 자신이 했던 배역을 다시 상상하기도 한다. 가장 머릿속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은 '8월의 크리스마스(1998년)' 속 정원. "37년 연기인생에서 가장 높은 점수를 주고 싶은 배역이에요. 그런데도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가 있더라고요. 지금 하면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8월의 크리스마스는 8월에 시작해서 12월에 끝나는 사랑이야기다. 시한부 인생을 사는 정원은 슬픔의 실체를 거의 드러내지 않는다. 대신 일상적인 행위와 언어로 작은 것들에 대한 소중함을 전한다. 잠시 머물렀다 사라지는 다림(심은하)을 반갑게 맞으면서도 차분하게 삶을 마감할 준비를 한다. 한석규는 "다시 그릴 수 있다면 연기를 하지 않을 것 같다"고 했다. "다림의 이야기에 더 귀를 기울일 거예요. 그녀가 뭐라고 이야기하는지, 나한테 원하는 게 무엇인지를 고민하고 생각할 거예요. 아주 작은 행동까지 꼼꼼하게 살펴본다면 진정한 정원의 마음이 나타나지 않을까요."


"8월에 다림이를 다시 만난다면..."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 스틸 컷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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