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이경호 기자]삼성물산-엘리엇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행동주의 투자자들은 우리나라 제도의 특수성을 전략적으로 활용하는 등 공격 수법이 정교하고 교묘해지고 있다. 엘리엇은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과정에서 5%룰 공시 관련 규정이나 감독의 맹점을 활용해 지분을 확보했다. SK를 대상으로 경영권분쟁을 일으킨 소버린 사태에서도 대주주 지분 3%룰과 같은 한국 제도의 특수성을 활용해 이사회 장악을 시도한 바 있다.
KT&G는 영국계 펀드인 TCI와 미국의 칼 아이칸 등 외국계 주주와 법정공방 등 경영권 분쟁을 겪었고 국내 일부 상장 해운사들도 노르웨이 해운사 골라LNG 등 유럽계 주주들로부터 공격을 받은 적이 있다.
헤지펀드의 본산인 미국에서조차 행동주의 투자자의 무차별공격에 대한 비판적 발언과 규제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지배구조 규제강화를 논의하면서 포이즌필, 차등의결권 등과 같은 효과적인 법적, 제도적 방어수단이 확보되어 있지 않아 상장회사들은 대규모의 자사주 매입이나 변칙적 순환출자 등을 이용해 대응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수단들은 법적, 경제적인 면에서 바람직하지 않을 뿐 아니라, 투입비용에 비해 방어의 효율이 낮음으로써 기업역량이 훼손된다.
포이즌필은 적대적인 인수합병(M&A)에 대응해 기존 주주에게 시가보다 싼 가격에 신주를 매입할 수 있도록 권리를 부여하는 제도. 적대적 매수자가 생겼어도 종전 주주가 주식 수를 늘려 버림으로써 경영권 장악 시도를 무산시킬 수 있다. 이는 미국에서는 가장 대표적인 적대적 M& 방어수단이다.
미국에서의 포이즌 필은 이사회 결의에 의해 채택할 수 있다. 일본의 경우 2001년 상법 개정을 통해 신주예약권이라는 명칭으로 도입해 상세한 규정을 두고 있었고 이후 2005년 신회사법을 단행법으로 제정하면서 신주예약권 무상배정제도와 취득조항부신주인수권제도를 추가로 도입했다. 미국식 포이즌 필과의 차이점은 비공개회사에서의 신주예약권의 모집을 비롯해 유리한 신주예약권의 발행 등에 주주총회가 관여하고 있으며, 신주예약권의 행사여부는 신주예약권자가 결정할 수 있다. 또한, 회사가 신주예약권의 행사를 강제하는 수단이 없고, 인수시도자를 제외한 주주만이 행사 가능한 신주예약권을 이용하거나 일정 비율 이상의 주식을 보유한 자 이외의 자에 대해서만 신주예약권을 배정하는 방법을 취하고 있다.
차등의결권은 '1주(株) 1의결권'이 아니라 특정 주식에 대해 더 많은 의결권을 부여. 테뉴어보팅(Tenure Voting)은 같은 종류의 주식이라도 보유한 지 일정 기간(일반적으로 24개월 또는36개월)이 경과한 경우라면 복수 의결권을 부여하는 방법이다. 미국은 주 회사법 차원에서는 주식의 의결권 수에 대한 규제가 없어 비상장회사는 아무 제한 없이 발행할 수 있으나, 상장회사에 대해서는 거래소 상장규정에 따라 금지된다. 다만, 회사가 이미 차등의결권 주식을 발행한 후 상장한 경우는 허용된다.
캐나다는 회사법 상 1주 1의결권이 원칙이나, 의결권에 변형을 가하는 주식에 관하여 정관에 규정을 두는 경우 허용된다. 다만, 미국과 마찬가지로 증권거래소 상장규정에 의한 규제가 이루어지고 있음.
유럽은 차등의결권주식에 우호적인 제도를 가지고 있는데, 유럽에서의 논의는 우리나라와 반대로 현재의 유연한 의결권 규제를 1주 1의결권 원칙으로 전환할 것인가의 문제로 다루어졌다. 나라별로 보면, 벨기에·독일·에스토니아·그리스·스페인·이탈리아·룩셈부르크·폴란드는 차등의결권주식을 인정하지 않고, 덴마크·프랑스·아일랜드·헝가리·네덜란드·핀란드·스웨덴·영국은 이를 허용하고 있다.
일본의 의결권 제한 주식도 보통주를 가지고도 발행할 수 있으나 이는 일부 사항에 관해 의결권이 있거나 없는 것이므로 의결권 자체에 변형을 가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아 차등의결권주식과 같이 의결권 수에 변형을 가하는 종류주식은 인정되고 있지 않았다. 다만, 단원주(單元株) 제도를 주주 간 불균등하게 적용하여 차등의결권 주식과 유사한 효과를 내고 있다.
황금주는 기업의 주요 의사결정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특별 주식. 창업주 혹은 종전 경영진이 황금주를 보유하고 있다면 적대적 매수자가 이사회를 장악하더라도 경영권 이양을 막을 수 있다.
국내서는 경영권 안전장치에 대한 요구가 계속돼 왔으나 국회에서 무산됐다. 적대적 M&A 등 외부에서의 경영권 위협은 커지는데 국내서는 정치권이 지배구조 규제는 더욱 강화하고 있어 경영권 방어는 기업 스스로의 노력 밖에 없다. 국회에서의 시도도 있어왔다. 정갑윤 전 새누리당 의원이 2015년 19대 국회에서 상법개정안을 발의했지만 제대로 논의도 못한 채 폐기됐다.
경제계 관계자는 "현행 기업지배구조 관련제도는 이미 선진국 수준인 만큼 제도를 계속 강화한다고 해 문제가 해결되기는 어렵다"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제도가 제대로 작동하게 하는 일인 만큼 제도강화로 추구할 것과 시장 감시로 할 것을 구분하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이경호 기자 gungho@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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