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이별 그리고 다시 만남…뮤지컬영화 '셰르부르의 우산' 정서 보다 세련되게 담아
발리우드 등 다양한 색깔 입혀 뮤지컬의 새로운 가능성 제시…오스카서 선전 기대
[아시아경제 이종길 기자]노르망디의 항구도시 셰르부르에 눈이 내린다. 화이트 크리스마스. 부산하던 주유소에 평온이 드리운다. 기이(니노 가스텔누오보)는 창문 너머 눈보라를 응시하는 아내 마들렌(엘렌 파르네)을 뒤에서 꼭 껴안는다. 마들렌은 간지러운 손길을 부드럽게 어루만진다. "당신 손이 차가워." 그녀는 외투를 걸쳐 입는다. 선물을 사려고 어린 아들을 데리고 외출한다. "산타 할아버지께 아빠 인사도 전해주렴." 이윽고 주유기 옆으로 벤츠 한 대가 미끄러지듯 들어온다. 주문을 받으러 나가는 기이. 순간 눈사람처럼 온몸이 얼어붙는다. 조용히 차에서 내리는 여인의 얼굴이 낯익다. 옛 사랑 쥬느뷔에브(카트린 드뇌브). "날씨가 춥네." "사무실로 가지."
'셰르부르의 우산(1964년)'의 3부 '재회(Troisieme Portie Le Retour)'는 어색함이 감돈다. 상처를 딛고 새로운 삶에 충실한 이들의 조우를 다룬다. 반드시 필요한 시퀀스는 아니다. 2부 '고독(Deuxieme Partie L'Absence)'에서 이뤄지지 못한 사랑을 '해피엔딩'으로 매듭짓는다. 쥬느뷔에브는 기이를 사랑하지만 어머니 에물리(안느 베농)의 반대에 부딪힌다. 마침 기이는 징집영장을 받아 전선으로 간다. 아이를 임신한 그녀는 기다리겠노라 약속하지만, 기울던 집안을 일으켜준 젊은 보석상 카잘(마크 미셀)의 구애를 받아들인다. 절름발이가 돼 귀향한 기이는 좌절하지만 마들렌의 도움으로 고통의 늪에서 헤어난다. '재회'는 그로부터 3년 뒤의 이야기다. 옛 연인의 어색한 대화에서 가시지 않은 상처와 아쉬움이 드러난다. '아 윌 웨이트 포유(I will wait for you)'의 슬픈 선율과 흩날리는 눈발이 더해져 깊은 여운을 남긴다.
'재회'의 진한 감성이 52년 만에 깨어났다. 영화 '라라랜드'의 '두 번째 겨울'이다. 사랑하는 사이였던 미아(에마 스톤)와 세바스찬(라이언 고슬링)은 5년 만에 재즈클럽에서 우연히 마주친다. 데이미언 셔젤 감독(31)은 직전 시퀀스인 '가을'에서 이별을 직접적으로 나타내지 않았다. "낮에 오니까 별로네", "갈 때까지 가보자" 등의 대사로 암시만 했다. '두 번째 겨울'에서 미아는 다른 남자의 손을 잡고 있다. 쥬느뷔에브처럼 사랑스런 딸도 있다. 세바스찬도 다르지 않다. 꿈꿔왔던 재즈클럽을 운영하며 새로운 삶에 녹아들었다. 하지만 객석의 미아와 눈이 마주치자 그 자리에 얼어붙는다. 어떤 말도 건네지 않는다. 대신 그녀의 귓가에 익숙한 피아노 선율로 무대를 휘감으며 추억과 아쉬움을 흘려보낸다.
'재회'를 모티브로 한 약 10분의 연주는 앞서 사계절에 흐른 음악들을 한데 모은 결합체다. 다양한 해석이 분분하지만 주체는 세바스찬이다. 정통재즈를 중시하는 이답게 상상 속의 단란한 가족을 8㎜ 카메라에 담은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는 돌이킬 수 없는 순간들로 거슬러 올라가 엇나간 이음매를 보수한다. 6년 전 자신의 연주에 넋이 나갔던 미아와 입을 맞추고, 화보 촬영으로 가지 못했던 그녀의 공연을 보고 기립박수를 친다. 지우지 못한 아쉬움을 행복한 상상으로 하나씩 바꿔나가며 이내 둘만 존재하는 초현실로 빠져든다.
이것이 헛된 꿈에 불과하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다. 의미를 부여하는 것조차 부질없다. 현재의 삶은 이상과 멀더라도 아쉬운 대로 경험할 가치가 있다. 하지만 '도#파#솔#라솔#파#레' 일곱 음의 반복으로 시작하는 슬픈 선율은 미아의 오감을 곤두세우듯 관객의 머리와 심장을 죄어 온다. 겉으로는 행복한 상상이지만 돌이킬 수 없는 슬픈 감정이 역설적 상황 속에서 부각된다. 관객이 가슴 깊숙이 묻어둔 절절했던 사랑을 기어코 끄집어낸다. 누구나 이런 기억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한낱 유치한 사랑이라도 관계없다. 기이와의 약속을 저버린 쥬느뷔에브도 말한다. "이 우연이 필요했나봐."
반세기가 지나도 유효한 정서. 중심에는 뮤지컬이 있다. 셔젤 감독은 팝으로 영화를 치장하지만 주요 감정은 재즈로 관통한다. 재즈는 대중음악에서 밀려난 지 오래다. 함께 성했던 뮤지컬영화도 1950년대를 정점으로 하향 곡선을 그린다. 관객이 영화에서 노래 부르는 인물을 유치하게 여기기 시작했고, 이 시간만큼 드라마의 진행이 더딘 것을 지루하게 받아들였다. 많은 제작진이 다른 장르처럼 대작 위주로 제작하고 완성도를 높이는데 힘썼지만 쇠퇴라는 대세를 거스를 수 없었다. 롭 마샬 감독(57)은 2002년 '시카고'로 이 악순환에 제동을 걸었다. 브로드웨이와 유럽에서 검증받은 무대를 영화로 옮기면서 영상 미학 안에 무대의 느낌을 세밀하게 녹였다. 특히 풍자적인 드라마가 흐르는 클럽 밖과 음악이 연주되는 보더빌 무대가 구분 없이 교차 진행되는 구조를 통해 장면 전환에 대한 설득력과 더불어 화려함을 부각했다. 상업성과 예술성을 동시에 인정받아 뮤지컬영화로는 '올리버(1968년)' 이후 35년 만에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했다.
'라라랜드'는 14년 만에 영광을 재현할 수 있다. 지난 8일 아카데미상의 전초전으로 불리는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작품상, 감독상 등 7관왕을 했다. '셰르부르의 우산' 속 정서를 세련되게 그렸기 때문만이 아니다. 세대가 바뀌고 관객이 이전 시대와 다른 방식으로 반응하고 있음을 다시금 증명했다. 뮤지컬영화의 황금기를 경험한 세대는 배우가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면 그대로 드라마에 이입됐다. 1970년~1990년대의 관객은 이런 작품을 유치하게 생각했다. 2000년대의 관객은 감정 이입을 원하지 않을뿐더러 음악이 등장해 드라마를 중단시키는 상황을 특별하게 즐겼다. '라라랜드'는 이를 그대로 뒤집어 또 하나의 방편으로 뮤지컬이 제시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과거 황금기의 뮤지컬영화에서 오늘날 관객이 수용할 수 있는 부분을 깔끔하게 빌리면서 노래만 불렀다 하면 시공을 초월해 MTV 스타일의 뮤직비디오로 돌변하는 발리우드 뮤지컬영화의 특징 등을 더했다.
이 영화의 흥행으로 뮤지컬영화의 황금기가 돌아온다고 믿는 이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앞으로 더 많은 작품들이 과거 속에 자신을 스스로 가두기보다 새로운 방식으로 관객과의 소통을 모색하려고 할 것이다. 황금기의 짙은 그늘에서 막 벗어나고 있으므로.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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