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첩정치의 말로…소통 꺼리고 시스템 무력화
"권력 집중 시스템 개선해야…토론 문화 조성"
[아시아경제 이민찬 기자] '수첩공주'. 국회의원 시절 늘 한 손에 수첩을 들고 다닌다고 해서 박근혜 대통령에게 붙여진 별명이다. 박 대통령은 자서전에서 '수첩공주'라는 별명에 대해 "소신과 원칙을 지켜주고 약속을 잊지 않도록 하는 수첩의 용도가 자랑스럽다"고 말하며 애정을 드러냈다. 박 대통령에게 수첩은 원칙과 약속을 상징하는 도구였던 것이다.
그런 수첩이 이젠 '불통'(不通)의 상징으로 통하며 박 대통령의 발목을 잡았다. 박근혜 정부 들어 반복된 인사실패는 '수첩 인사' 때문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박 대통령의 수첩에 적히지 않으면 아무리 능력과 인품이 훌륭해도 공직에 나설 수 없다는 걸 꼬집은 것이다. 박 대통령의 수첩 정치는 시간이 지날수록 고집과 불통의 이미지로 굳어졌다.
2013년 취임 이후 받아쓰기를 강조해 온 박 대통령.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에 연루돼 구속된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의 수첩 17권에는 박 대통령의 지시가 깨알같이 적혀 있었다. 이 수첩들은 박 대통령이 최순실 사태에 깊숙이 연루돼 있다는 결정적인 증거 역할을 하고 있다.
정상적인 청와대의 모습이라면 대통령과 수석들이 수시로 모여 치열하게 국정 전반에 대해 토론을 펼쳤을 것이다. 하지만 현 정부에선 달랐다. 비서실장조차 대통령의 얼굴을 보기가 힘들었다고 한다. '괜찮은' 경제학자로 알려진 안 전 수석이 가끔 걸려오는 박 대통령의 전화를 받고, 허겁지겁 수첩을 펼쳐 지시를 받아 적는 모습을 생각하면 끔찍하다고 힐난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박 대통령의 탄핵을 불러온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는 결국 불통의 산물이다. 대통령이 국정에 대해 비서진, 전문가 등과 소통하지 않으니 사람들은 비선에 줄을 서기 시작했다. "이번 정부에선 김기춘 실장을 통하면 된다.", "우병우 수석에게 줄을 대면 한 자리 얻을 수 있다." 관가에서 떠돌던 이 같은 말들이 있었지만, 사실 그 뒤엔 최순실이 있었던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이는 시스템이 무너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스템이 실종 후 대한민국 국정은 비선들의 놀이터로 변했다. 비선들의 낙하산 부대는 정부부처 뿐 아니라 민간 기업까지 침투했다. 민간의 시스템도 정상은 아니라는 얘기다. 우리나라의 대표 기업인 삼성마저 최순실을 찾아가는 상황이 됐다. 불투명한 시스템은 이렇게 우리 사회에 뿌리깊게 내려앉으며 좀먹고 있다.
소통은 늘 우리 사회의 화두였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불통에 신음하고 있다. 소통의 채널을 열고 시스템을 복원하지 않으면, 역사는 반복된다. 최영진 중앙대 교수(정치국제학과)는 "과거 소통을 원활하게 했다는 노무현·이명박 정부에서도 측근 비리는 있었다"며 "인사와 예산 등 모든 권력이 대통령에게 집중돼 있고, 이를 통제할 수 없는게 본질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시스템 개선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이어 "대통령과 다른 말을 할 수 있고,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일 수 있는 문화를 조성해야 한다"며 "그렇지 않으면 제2·3의 최순실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이민찬 기자 leemi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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