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그사람]184년전 오늘 태어난 그의 인생역전극…어마어마한 건축비· "생뚱맞다" 여론에 20년 뒤 철거하기로 하고
에펠탑은 프랑스 파리의 상징이다. 파리 시민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으며 매년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관광객들을 불러 모으는 곳 중 하나로 꼽힌다. 한 해 600만 명의 관광객이 방문하며 관광 비수기인 요즘은 하루 6000명이 찾는다고 한다. 가치도 엄청나다. 2012년 이탈리아 몬차 브리안차 상공회의소가 조사한 결과 에펠탑의 가치는 4346억 유로에 달했다. 이는 당시 한화로 619조2000억원 상당이었다. 그렇다면 이를 만들어 자신의 이름을 붙인 건축가 귀스타브 에펠은 얼마를 벌었을까.
15일은 에펠탑을 세운 귀스타브 에펠이 태어난 지 184년이 되는 날이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전 인류가 기억하게 만든 건축물을 남겼지만 처음부터 건축가로서 승승장구했던 것은 아니다. 에펠은 실용기술을 중시하는 중앙공예학교를 다녔는데 학창시절에는 두각을 나타내지는 못했다고 한다. 특히 건축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도안에 서툴렀다고 전해진다. 전공도 그가 남긴 건축물과는 동떨어진 화학이었다. 에펠이 철에 대한 그의 재능을 꽃피운 것은 학교를 졸업하고 철도 시설 기술자였던 샤를 누보를 만나면서부터였다. 그는 누보와 함께 철교를 만들며 점차 명성을 얻게 됐다.
다시 에펠탑 얘기로 돌아와서, 1886년. 3년 뒤에 치러지는 프랑스혁명 100주년 기념 파리 만국박람회 조형물 공모에서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선택된 에펠은 난관에 봉착했다. 조직위원회의 예산은 150만 프랑인데 에펠탑을 만드는 데는 이보다 650만 프랑이 더 투입될 것으로 예상됐기 때문이다. 이때 에펠은 승부수를 던졌다. 650만 프랑의 차액을 부담하고 20년 동안 에펠탑을 통한 수익금을 자신이 가져가기로 계약을 한 것이다. 당시 에펠탑은 20년만 유지된 후 해체될 계획이었다고 한다.
그의 선택이 승부수였던 이유는 처음엔 에펠탑에 혹평이 쏟아져 수익을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문화·예술계에서는 역사적인 건물이 많은 파리에 우뚝 솟은 철골 구조물이 느닷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았다. 대표적인 이가 대문호 모파상이다. 그는 에펠탑이 '철사다리로 된 깡마른 피라미드'라고 비난했고 세워진 뒤에도 자신의 작품에서 에펠탑에 대한 반감을 숨기지 않았다. 몽소공원에 세워진 자신의 동상도 에펠탑을 보지 못하도록 돌려세웠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하지만 정작 뚜껑을 열어보니 에펠의 승부수는 적중했다. 그는 그해 에펠탑 입장 수익으로만 자신이 투자한 650만 프랑을 모두 회수했고 이후 20년간 에펠탑의 수익을 독점할 수 있었다.
당초 20년만 유지하기로 했던 에펠탑은 준공 20년이 되던 1909년 해체 위기를 맞았지만 그 무렵 발명된 무선 전신 전화의 안테나로 탑을 이용하게 되면서 위기를 넘겼고 이제는 파리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최근 에펠탑의 계단이 경매에 나왔다는 소식을 보면 그 가치는 점점 더 오르고 있다. 1983년 에펠탑을 수리하는 과정에서 하중을 줄이기 위해 떼어낸 2.6미터짜리 계단의 예상 낙찰가격은 4만 유로(5000만원)였다. 단지 계단 서너 칸의 가격이다. 2007년에는 4.5미터 계단 조각이 2억5000만원에 팔리기도 했다.
이처럼 처음에는 인정받지 못했지만 이후 명성을 얻어 우뚝 서게 된 것은 건축가 에펠과 그가 남긴 에펠탑의 공통점이다. 파리 시민들도 계속 보게 되니 에펠탑에 정이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어떤 대상을 자주 보면 호감을 갖게 된다는 심리학에서의 '단순노출효과'를 에펠탑 효과라고도 부른다. 그렇다고 모든 대상에서 에펠탑 효과를 기대할 수는 없는 모양이다. 자주 봐도 호감은커녕 울분만 치솟는 경우도 있다. 요사이 북악산 밑자락 저 자리가 그렇다.
김철현 기자 kc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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