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정준영 기자] 검찰이 박근혜 대통령과 직접 접촉한 대기업 총수들을 모두 불러 조사하기로 했다. 비선실세를 사이에 두고 청와대 핵심 참모들과 국내 기업들이 상호 지원사격에 나선 정황이 속속 불거지며, 재계로서는 ‘거래자’와 ‘피해자’ 사이에서 입장을 정리해야 할 상황이다.
13일 법조계에 따르면 검찰 특별수사본부(본부장 이영렬 서울중앙지검장)는 전날부터 이날 새벽 사이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김창근 SK 수펙스추구협의회 의장 등을 불러 조사했다. 이들은 삼성, LG, 롯데, CJ 등과 더불어 작년 7월 박근혜 대통령과 개별 면담한 것으로 지목된 대기업집단의 최대주주 총수 내지 대리자다.
검찰은 이르면 이날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구본무 LG그룹 회장 등 나머지 면담 대상도 차례로 불러 조사할 방침이다. 검찰 관계자는 "아직 조사가 이뤄지지 않은 독대 기업 총수들도 모두 소환조사할 것"이라면서 다만 "검찰 출석 전까지는 구체적인 소환일정을 밝힐 수 없다"고 전했다.
미르·K스포츠재단에 수백억원을 쏟아 부은 국내 기업들은 국정농단 사태의 핵심 축 가운데 하나다. 청와대 비호 아래 최순실·차은택(구속)씨가 거머쥔 이권이 결국 이들의 주머니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그간 재단 출연기업들에 대한 전수조사 방침 아래 각 그룹 대관업무 담당 임원이나 서면 자술서를 통해 지원경위를 추궁해 온 검찰이 총수 직접 소환으로 선회한 데는 ‘대가도, 피해도 아니다’며 ‘자발적 모금’ 주장을 거듭하는 재계의 태도가 실체 규명과 배치된다고 판단한 반증으로 읽힌다.
박 대통령의 지시, 최소한 묵인·방조가 짙게 의심받는 상황에서 명목상 ‘참고인’으로 다녀간 재계 총수들은 피해자냐, 공범이냐의 기로 위에 선 셈이다. 검찰은 ‘대통령-비선실세-재계’로 이어지는 거래관계가 큰 줄기에서 설립주체와 출연주체가 분리된 ‘재단’을 차용함에 따라 일단 드러난 실행범은 직권남용 책임을 물어 체포·구속했지만, 형사소추마저 빗겨가는 현직 대통령의 관여 여부를 입증하는 데 애를 먹고 있다.
비자발적인 재단 설립·운영, 직·간접적으로 재단 내지 비선실세를 경유한 인사개입과 특혜 지원, 이를 전후로 한 사정무마 내지 정책적 지원 등은 거래 주체가 국정 전반을 통할하는 행정부 수반임을 지목하는 유력한 정황이다. 개별 기업마다 처한 상황따라 지원의 강도도 달랐다. 재단 설립을 불과 석 달 앞둔 작년 7월 대통령-총수 독대 자리가 특히 주목받는 배경이다.
최순실씨 구속기간이 오는 20일까지임을 감안할 때 이번 주말 전후로 유력시되는 검찰의 박 대통령 방문조사를 앞두고 거래의 실질이 ‘대가’인지 ‘피해’인지 가르마를 타야할 시점이다. 정책수혜, 총수사면, 일부 기업의 적극적인 지원 정황 등은 재계가 권력 앞에 무릎 꿇었다기보다, 비선실세에까지 줄을 대어가며 거래에 나선 것 아니냐는 지적이 많다. 기업들로서는 피해자를 자처하는 것이 유리하다.
판례상 대통령과의 ‘뒷거래’는 굳이 우대까지 이르지 않더라도 불이익을 면케 해달라는 것만으로도 대가성이 인정된다. 특정 수혜와 자금거래가 직접 매인 관계일 필요도 없고, 대통령이 구체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했는지도 따지지 않는다. 제왕적 대통령제의 이면이다. 국내 기업들의 자금조성·지원이 ‘뇌물’로 판명나면 재계는 뇌물공여는 물론 배임 책임까지 떠안아야 한다. 차라리 불이익 겁박에 금고를 헐었다며 ‘공갈’, ‘강요’ 피해를 주장하는 편이 나은 이유다.
재계는 어느 때보다 대통령의 ‘입’에 속내를 태울 것으로 보인다. 그간 박 대통령은 “선의의 도움을 주셨던 기업인 여러분”이라며 거래관계를 부정하는 가이드라인을 유지해 왔다. 어느 쪽이든 석연찮은 진술로 책임을 피해가려 할 경우 정·관·재계 전방위 사정으로 확대될 위험도 현재 진행형이다. 검찰이 언론의 주목도가 떨어지는 주말에 재계 총수들을 비공개 소환한 성격 역시 조사결과에 따라 ‘배려’와 ‘회유’ 사이에서 결과적으로 평가될 국면이다.
정준영 기자 foxfury@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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