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르', 용(龍)을 뜻하는 순수 우리말이다. 동양에서 용은 예로부터 '임금님'을 상징하는 단어였다. 저성장과 불황의 시대에, 재벌들이 '임금님 재단'에 486억원을 냈다. 16개 그룹에 소속된 30개 기업이 동참했다. 전경련은 자발적인 참여라고 해명했지만 이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광주학살의 주역이자 군사 독재자였던 전두환의 호를 딴 일해(日海) 재단도 재벌들로부터 돈을 걷었다. 전두환의 충복이자 안전기획부(안기부) 부장인 장세동은 5공 청문회에서 강제모금이 아니라고 주장했지만, 청문회에 출석했던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은 "내라고 하니까 내는 게 마음 편할 것 같아서 냈다"라고 진실을 털어놨다.
얼마 전까지 미국에서는 연방수사국(FBI)과 애플 사이에 아이폰 5C의 잠금해제 협조를 둘러싼 논란이 있었다. 2015년 12월 캘리포니아주 샌버너디노에서 14명이 숨진 총기 테러가 있었는데 FBI는 테러범의 스마트폰 잠금해제를 하지 못해 수사에 애를 먹었다. 그래서 애플에 잠금해제 협조를 요청했지만 애플은 거절했다. FBI는 법원으로부터 협조 강제명령을 받았지만, 애플의 팀 쿡 회장은 다시 거절하며 법원 명령에 이의제기했다. 만일 한국에서 이와 유사한 일이 벌어졌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채동욱 검찰총장이 물러난 사건, 최근 유력 보수언론과 박근혜 정부와의 갈등이 마무리되는 과정, 그리고 미르재단 사건 등을 종합해볼 때, 한국의 어느 재벌그룹이 애플의 팀 쿡 회장처럼 '권력의 요구'를 거절한다면, 그 회사와 회장님은 검찰수사, 국세청 세무감사, 금감원 조사, 공정위 조사를 동시에 받아서, 결국 망하거나 누군가는 감옥에 가게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한국과 미국의 차이는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우리는 미국처럼 될 수 없는 것일까? 분명히 군사독재 시대가 아니라 민주화가 이뤄진 시대인데, 기업들이 '임금님 재단'에 납부를 하지 않아도 되는 대한민국은 도대체 어떻게 가능한가?
한국 자본주의의 '원천기술 보유자'는 박정희다. 박정희가 만든 한국경제는 관료주도 계획경제였다. 강력한 독재자가 관료에게 지시하면, 관료는 다시 재벌에게 지시하고, 재벌이 중소기업에게 지시하는 경제체제였다. 즉, 수직적 상명하복에 의한 톱다운(Top-Down) 방식의 경제체제였다. 박정희의 경제체제는 1970년대에는 가장 진취적인 모델이었다. 한국경제 성공에 기여했다. 그러나, 박정희가 만든 한국의 관료체제, 기업지배구조, 경제체제에는 '독재자와 그 시대'의 흔적이 깊게 새겨져 있다. 중앙집권적이고, 권위주의적인 관료-경제체제이다. 이는 아래로부터의 혁신이 중요시되는, '최초의 선도자(First Mover) 모델'과는 상극관계 혹은 적대적 관계이다.
이제 박정희가 만든, 관료가 주도하던 '국가주도 시장경제'와 단절해야 한다. 민간이 주도하는 '민주적 자유시장경제'로 체제 전환을 해야 한다. 미르(용)의 나라를, 민간이 주인되는 자유시장경제로 바꿔야 한다. 87년 6월 항쟁의 못다 한 꿈이 그랬듯이.
최병천 정책혁신가, 전 국회의원 보좌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