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규모 지진 자주 발생한 것으로 기록돼
[아시아경제 정종오 기자] 조선시대에 발생한 우리나라의 지진 역사를 살펴본 결과 큰 지진이 많이 발생했고 인명피해도 일어난 것으로 확인됐다. 우리나라가 지진으로부터 안전지대가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과학이 발달한 지금애도 우리나라는 관측소 부족과 지진 측정 정확도에서 한참 뒤처져 있다. 지진이 일어났는데도 국민안전처는 '잠들었고' 기상청은 진원조차 특정하지 못하는 촌극을 벌이고 있다.
지진에 무방비 상태나 다름없다는 자조적인 말까지 나오고 있다. 이런 가운데 국민들의 불안은 커지고 있다. 조선시대에 발생한 지진의 역사적 고찰을 통해 우리나라의 지진 역사를 파악할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조선시대에 일어난 큰 지진을 보면 해당 지진의 규모가 상당했음을 보여준다.
◆"밤새 노숙하며 집에 들어가지 못했다"…1518년(중종 13년)= 중종 시절이나 지금이나 지진이 일어나면 '집에 못 들어가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조선 중종 13년(1518년) 한양에 지진이 일어났다. 당시 지진을 중종실록에서는 이렇게 적고 있다.
"유시(酉時)에 세 차례 크게 지진(地震)이 있었다. 그 소리가 마치 성난 우레 소리처럼 커서 인마(人馬)가 모두 피하고, 담장과 성첩(城堞)이 무너지고 떨어져서, 도성 안 사람들이 모두 놀라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모르고, 밤새도록 노숙하며 제 집으로 들어가지 못하니, 고로(故老)들이 모두 옛날에는 없던 일이라 하였다. 팔도(八道)가 다 마찬가지였다."
지금과 달라진 게 없어 보인다. 경주 시민들이 규모 5.1의 전진, 5.8의 본진, 4.5의 여진을 겪으면서 '불안과 공포'로 뜬 눈을 세웠다. 초등학생들은 지진으로 점심을 운동장에서 먹는 지경에 이르렀다. 집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텐트를 치고 잠을 자는 상황이다. 600년이 흐른 지금도 우리나라는 지진이 발생하면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
◆"포 쏘는 소리가 들리고 바위가 터져 나왔다"…1597년(선조 30년)=선조30년인 1597년엔 더 큰 규모의 지진이 발생한 것으로 역사서는 기록하고 있다. 이때 함경남도 지역에 큰 지진이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함경도 관찰사 송언신은 "소농보(小農堡) 건너편 북쪽에 있는 덕자이천(德者耳遷) 절벽의 사람이 발을 붙일 수 없는 곳에서 두 차례나 포를 쏘는 소리가 들려 쳐다보니 연기가 하늘 높이 솟아오르고 크기가 몇 아름씩 되는 바위가 연기를 따라 터져 나와 종적도 없이 큰 산을 넘어갔다"라고 편지를 썼다.
'성 두 군데가 무너졌다'라고 후속 편지를 쓴 것으로 보아 상당한 규모이 지진이 발생했음을 유추해 볼 수 있다.
◆"바닷물이 육지로 밀려왔다"…1643년(인조 21년)=지진 해일이 있었다는 기록도 확인된다. 인조 21년인 1643년 경상 감사는 비상 장계를 올린다.
승정원일기에 기록돼 있는 당시 장계를 보면 "경상좌도에서는 안동(安東)에서 시작하여 영해(寧海), 영덕(盈德) 이하에서부터 옆으로 돌아 금산(金山)에 이르기까지의 각 고을에, 이달 9일 신시와 10일 진시에 두 차례 지진이 일어나서 성첩이 많이 무너졌습니다. 울산(蔚山)도 같은 날 같은 시각에 지진이 일어났는데, 부(府)의 동쪽 13리 되는 조수(潮水)가 드나드는 곳에서 바다 가운데의 큰 파도처럼 물이 격렬하게 솟구쳐서 육지로 1, 2보까지 밀려 왔다가 도로 들어갔다"라고 기록했다.
이 기록에서 두 가지 사실이 주목된다. '바닷물이 큰 파도처럼 솟구쳐서 육지로 밀려왔다'라는 부분이다. 이는 지진해일이 발생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 울산 지역에서 같은 날 지진이 일어났다는 부분도 눈길을 끈다.
◆"8도에서 모두 지진이 일어났다"…1681년(숙종 7년)=강원도에서 일어난 지진이 전국적으로 영향을 끼쳤다는 기록도 있다. 숙종 7년인 1681년 강원도에서 지진이 발생했다. 이 때문에 설악산에 있던 큰 바위가 붕괴됐다는 소식까지 다루고 있다. 바닷물도 요동쳤다는 기록도 보인다.
숙종실록에서는 당시 지진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강원도(江原道)에서 지진(地震)이 일어났는데, 소리가 우레가 같았고 담벽이 무너졌으며, 기와가 날아가 떨어졌다. 양양(襄陽)에서는 바닷물이 요동쳤는데, 마치 소리가 물이 끓는 것 같았고, 설악산(雪岳山)의 신흥사(神興寺) 및 계조굴(繼祖窟)의 거암(巨巖)이 모두 붕괴[崩頹]되었다. 삼척부(三陟府) 서쪽 두타산(頭陀山) 층암(層巖)은 옛부터 돌이 움직인다고 하였는데, 모두 붕괴되었다. 그리고 부(府)의 동쪽 능파대(凌波臺) 수중(水中)의 10여 장(丈) 되는 돌이 가운데가 부러지고 바닷물이 조수(潮水)가 밀려가는 모양과 같았는데, 평일에 물이 찼던 곳이 1백여 보(步) 혹은 5, 60보 노출(露出)되었다. 평창(平昌)·정선(旌善)에도 또한 산악(山岳)이 크게 흔들려서 암석(巖石)이 추락하는 변괴(變怪)가 있었다. 이후 강릉(江陵)·양양(襄陽)·삼척(三陟)·울진(蔚珍)·평해(平海)·정선(旌善) 등의 고을에서 거의 10여 차례나 지동(地動)하였는데, 이때 8도(八道)에서 모두 지진이 일어났다."
이번 경주 지진도 전국에서 진동을 느낄 만큼 강력했다. 조선시대에도 이 같은 지진이 발생했음을 파악할 수 있다.
◆"집이 무너지고 사람이 죽었다"…1810년(순조 10년)=집이 무너지고 사람이 사망하는 지진까지 조선시대에는 발생했다. 1810년인 순조 10년의 기록을 보면 처참했던 당시를 떠올릴 수 있다. 함경감사 조윤대가 기록한 내용이다. 조윤대는 "14일 동안 지진이 계속됐다"라고 기록하고 있어 전진, 본진, 여진이 이어졌음을 알려준다.
"이달 16일 미시(未時)에 명천(明川)·경성(鏡城)·회령(會寧) 등지에 지진(地震)이 일어나 집이 흔들리고 성첩(城堞)이 무너졌으며, 산기슭에 사태가 나서 사람과 가축이 깔려 죽기도 하였습니다. 같은 날 부령부(富寧府)에도 지진이 일어나 무너진 집이 38호이고, 사람과 가축 역시 깔려 죽었습니다. 16일부터 29일에 이르기까지 지진이 없는 날이 없어 한 주야(晝夜) 안에 8, 9차례나 5, 6차례씩 있었는데, 이따금 땅이 꺼지고 샘이 폐색(閉塞)되는 곳도 있었다고 합니다. 부령에서 연달아 14일 동안이나 지진이 그치지 않았다."
강태섭 부경대 지구환경과학과 교수는 이 같은 조선시대 지진이 기록역사를 설명하면서 "공포는 우리가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것을 경험하게 되면서 비롯된다"며 "역사서를 보면 한반도에 끊임없이 지진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
강 교수는 "역사적 기록을 통한 지진 분석은 물론 정밀 분석 작업 등으로 지진으로 국민들이 피해를 입지 않도록 예방책을 강구하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정종오 기자 ikokid@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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