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과 현실 사이…조선인 고등경찰과 의열단을 오간 이중간첩의 진짜얼굴 들여다보니
[아시아경제 김희윤 작가] “간첩의 종류에는 다섯 가지가 있는데, (...) 이들 중 적의 간첩을 역으로 쓰는 반간(叛間)에 가장 후한 대우를 해줘야 한다.” - 손자병법 중
지난 추석 연휴 5일 동안만 관객 337만 명을 기록, 누적 관객 수 600만 명을 돌파한 영화 ‘밀정’의 흥행독주가 거센 가운데, 영화의 모티브가 된 실존 인물 황옥과 김시현, 그리고 의열단의 활약상에 대중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확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을 두고 황옥이 일제의 밀정이었느냐, 밀정을 위장한 이중간첩 의열단이었는가에 대한 논쟁이 분분하지만, 영화는 영화고 역사는 역사일 뿐. 기록으로 남아있는 황옥 경부의 궤적을 좇다 보면 판단은 오롯이 관객의 몫이 된다.
일본 고등경찰과 경부 황옥
황옥은 1920년 3월 경기도경찰부 직속 도경부에 특채, 고등과에 근무하며 높은 성과를 올리던 유능한 조선인 고등경찰이었다. 당시 김상옥의 종로경찰서 폭탄투척 사건 직후 그 배후 세력으로 지목된 의열단에 대한 공작의 필요성을 느끼던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마루야마 쓰루키치는 그들의 본거지인 북경에 수사관을 밀파하기로 하고, 다수의 인재들 중 조선인 황옥을 선발한다.
고등경찰 채용 3년 만에 경무국장 직속 공작업무를 맡게 된 황옥은 그길로 장기 병가원을 제출한 뒤 1923년 2월 5일 중국으로 출국하고, 한편 종로서에 구금 중인 동료 김한의 동태를 파악하기 위해 의열단원 김시현은 지연을 이용해 황옥에게 접근, 두 사람의 위험한 동행이 시작된다.
상하이, 김원봉과의 접견
영화에서 송강호와 공유는 도자기 밀반입을 사업화하자는 구실로 의기투합하지만, 실제 황옥과 김시현은 아편 밀수를 미끼로 서로의 신분을 숨긴 채 오월동주 했다. 김시현은 황옥을 안동현 육도만에 위치한 여관에 3일간 감금, 각고의 설득 끝에 그를 의열단으로 포섭했다고 상부에 보고했으나 황옥 역시 경무국장에게 의열단 본부에 잠입한다는 보고를 보내고 김시현과 함께 상하이 프랑스 조계(외국인통치 특별구)로 이동, 의열단장 김원봉을 접견하고 이들의 부탁을 순순히 수락한다.
밀정인가, 이중간첩인가?
김원봉은 황옥이 완전히 자신의 사람이 됐다고 생각한 것일까? 의열단 입장에서 1923년 당시 선택의 폭은 그리 넓지 않았다. 국내 공작을 담당하던 요원 김현이 체포되자 폭탄과 권총을 반입할 길이 막막해진 상태였으므로, 설령 황옥이 온전히 우리 사람이 아니더라도 그 위험부담마저 안고 무기의 반입만을 목표로 그를 이용했다고 봐도 무방할 터. 이후 황옥은 마루아먀 국장이 자신에게 붙인 경성경찰서 경부 하시모토를 상하이로 따돌리고 의열단과 함께 폭탄과 무기를 안동역으로 반입하는 데 성공하지만, 압록강을 건너 국내에 잠입 후 폭탄을 경성으로 이동하기 위해 열차에 오른 뒤 평북도경에 매수된 단원의 밀고로 전원 체포됐다.
1923년 8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들에 대한 공판이 벌어졌고 김시현과 황옥은 징역 10년을 언도 받았다. 이 재판에서 김시현과 의열단원들은 시종 황옥을 감싸는 듯한 발언을 이어나간 반면 황옥은 “경찰로서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노력했고, 이번에 반입한 폭탄을 자신이 주도해 역으로 검거하면 부장과 과장, 그리고 경무국장까지 자신의 공을 인정해 경시까지 승급시켜줄 것을 확신했다”며 눈물로 재판장에게 호소해 방청석에 가득 찬 조선인들의 비난을 샀다. 그의 진술을 들은 몇몇 의열단원들은 이후 그를 증오하고 저주하는 진술로 자신이 속은 것을 원통해 했고, 신문은 일제히 호외를 통해 ‘황옥경부 폭탄사건’의 전모와 공판 내용을 시시각각 보도했다.
반민특위와 납북
이후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된 황옥은 장결핵 증상으로 형 집행이 정지, 감형되었다 재수감돼 1929년 가출옥했다. 이후 행적은 뚜렷이 기록에 남은 바 없으나, 같은 해 먼저 출소한 김시현과 만남을 갖는 한편 당시 상하이를 오가던 의열단원 우승규와도 교류하고, 지방의 애국지사들과 모임을 이어나갔다.
해방 후엔 김시현과 함께 조선독립운동사편찬발기인회에 이름을 올렸고, 미군정기 제2 경무총감부(전주)에서 경무총감으로 근무하며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의 반민자 김태석 공판에 증인으로 출석, 자신이 경기도경찰부에서 근무할 당시 상관으로 있던 김태석의 친일과 악행에 대해 증언했다. 정부수립 후 1950년 5월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한 황옥은 6.25 전쟁 발발 직후 북한군에 의해 강제 연행돼 북한에서 생을 마쳤다.
시대가 껴안지 못한 행적
암살과 파괴공작을 통해 일제에 큰 위협이 된 의열단 활동에 있어 ‘황옥경부 폭탄사건’은 대규모 직접투쟁을 저지시킨 안타까운 지점이자 거사 직전 사건이 발각됨에 따라 사건의 중심에 선 황옥은 의혹과 비난을 피할 수 없는 논쟁적 인물로 역사에 남아있다. 학계에선 경기도경찰부 비밀경찰로 고급 밀정활동을 펼친 황옥의 행적은 일제가 의열단 활동을 저지하기 위해 침투시킨 대표적 공작활동이라는 설이 지배적이나, 출옥 후 그가 김시현, 우승규와 같은 의열단원들과 지속적으로 교류했고, 해방 후 반민특위에서 친일경찰의 악행을 증언한 점. 그리고 의열단장 김원봉이 황옥을 두고 “경기도경찰부 고등과 경부이나 과거 의열단원으로 활동했으며, 불행히 관헌에 체포된 애련한 자”라고 발언한 것을 놓고 보자면 막연히 그를 친일반민족행위자라 규정할 수도 없는 상황.
어쩌면, 영화가 그려낸 이정출의 지하활동은 ‘위장 친일파’에 대한 논쟁을 깨끗이 마무리하지 못한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역사적 가정이 아니었을까? 영화 ‘밀정’ 마지막, 격렬한 폭음(爆音)은 1923년 터트리지 못한 폭탄에 대한 민족의 분노에 표하는 현재의 인사일 것이다.
김희윤 작가 film4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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