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국회의원에 당선되고 한 선배 의원이 밥을 사주면서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다. “국회의원이 뭐하는 직업인 줄 알아요?” 의도를 파악하기 어려워 가만히 쳐다보자 그분은 “안 걸린 놈이 걸린 놈 욕하는 직업이에요”라고 웃으며 대답했다. 그때는 웃고 넘겼지만 의정활동을 하는 내내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화두였다. 나는 누군가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을 만큼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고 있는 것인가!
또 하나 세상에는 관행이라는 것이 있다. 법적으로는 문제가 되지 않지만 도덕적으로는 문제가 될 소지가 있고, 힘 있는 사람이 하면 죄가 되지 않지만 힘 없는 사람이 걸리면 범죄자가 되는 일들, 혹은 지금은 문제되지 않는 일들이 시간이 지나면 범죄가 되는 일들이다.
요즘 ‘김영란법’을 둘러싼 논쟁을 보면서 내 자신도 많은 반성을 한다. 누군가에게 봉투를 받거나 비싼 선물을 받으면서 지내지는 않았지만 관행이라는 이름 안에서, 이 정도는 의례히 남들도 하는 것이니 가끔은 밥을 얻어먹기도 하고, 누군가에게 밥을 사주기도 해왔다. 연일 쏟아지는 신문 기사들을 읽으면서 속으로 ‘여의도 물가를 고려하면 3만원으로 먹을 수 있는 것이 없을텐데…’라는 생각을 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다 문뜩 “꼭 먹어야 하는건가”라는 질문에 스스로 답하지 못한다는 걸 알게 됐다.
김영란법의 정식 이름은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이다. 3만원까지는 밥을 먹을 수 있고, 5만원까지는 선물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허용해주기 위한 법이 아니다. 원칙적으로 공직이나 공적업무를 하는 사람은 남에게 기대어 살지 말아야 한다고 하는 사회적 제안이다.
국세청 조사에 따르면 하루에 접대비로 지출되는 돈은 270억원에 이른다. 이는 법인의 신고금액을 환산한 것이고, 기관이나 개인 혹은 신고하지 않은 검은 금액을 포함하면 이보다 훨씬 많아질 것은 자명하다. 현실성을 고려해 한 끼 식대를 3만원에서 5만원으로 올려야 한다는 인식 안에는 사주는 사람도, 얻어먹는 사람도 어차피 당신돈은 아니지 않냐라는 인식이 포함돼 있다. 그 돈은 국민의 세금이거나 주주 혹은 노동자에게 돌아가야 할 기업 이윤의 일부임에도 말이다. 세상에 주인이 없는 돈은 없고, 이유 없이 남에게 돈을 주는 사람도 없다.
정치인과 기자가 식사를 한다고 해서 다음날 1면에 기사를 실어주지는 않는다. 기업가와 공무원이 골프를 한 번 쳤다고 다음날 바로 인허가를 내주지도 않을 것이다. 직접적인 업무연관이 없음을 주장하는 논거들이 쏟아져 나올 것이다. 아이를 학교에 보냈는데 옆집 학생의 부모님이 선생님과 종종 만나서 식사를 한다고 생각해 보자. 미리 옆집 아이에게 시험지를 꺼내서 보여주거나 성적을 고쳐주지는 않겠지만 그 자체로 불공정한 게임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은 여실하다. 이러한 불공정을 해소하자고 하는 것이 김영란법의 취지이다.
물론 초기에는 많은 혼란이 있을 수 있다. 법이 있어도 여전히 관행처럼 굳어져 내려오는 틀이 있기에 법을 피해가기 위한 요령들이 자기만의 노하우인 것처럼 쏟아져 나올 것이고, 법을 어겨서가 아니라 재수 없이 걸렸다는 조롱이 시작될 것이다. 경제에 위기가 초래될 것이라는 이야기도 물론 빠지지 않고 등장할 것이다.
그러나 금융실명제가 처음 등장할 때 제기된 한국경제가 송두리째 흔들릴 것이라는 주장은 기우에 불과했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오세훈법이 만들어지면서 이제 봉투를 주고받는 정치인은 거의 사라졌고 그것은 관행이 아니라 범죄라는 인식이 지배하게 됐다. 세상은 언제나 앞으로 나아간다. 어제까지 그래왔다고 그게 옳은 것은 아니다.
김광진 전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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