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조영주 기자] 정부와 한국은행이 산업 구조조정을 위해 '한국판 부실자산구제프로그램(TARP)'을 도입하는 방안을 본격 논의한다. TARP는 미국이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도입한 구제금융 종합대책으로, 구조조정의 모범사례로 꼽히고 있다.
정부 관계자는 3일 "한국은행 등 관계기관들과 함께 구조조정 전반에 걸쳐 어떤 방식으로 진행할 지에 대한 논의를 진행할 계획"이라며 "미국의 TARP를 모델로 한 방안도 검토할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한국판 TARP에는 상당히 높은 수준의 기업 자체 구조조정 전제조건을 달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에서 벌어진 모럴해저드(도덕적 해이) 논란을 사전에 차단하겠다는 것이다.
정부는 4일 최상목 기획재정부 1차관 주재로 금융위원회, 한국은행, 국책은행 등 관계기관이 참석한 가운데 국책은행 자본확충을 위한 태스크포스(TF) 첫 회의를 열어 향후 구조조정 추진방안을 본격 논의한다.
◆정중(정부+중앙은행)합작 "빠르고 과감하게"= 향후 해운·조선 등 한계산업에 대한 구조조정은 정부의 재정투입과 한국판 양적완화가 병행되는 방식으로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구조조정이 얼마나 신속하고 과감하게 진행되느냐에 따라 성패가 갈리는 만큼 속도와 추진력을 확보하는 것이 관건으로 꼽힌다. TARP를 벤치마킹하는 것도 미국 정부의 신속한 대응체제를 응용하기 위한 것이다.
미국 정부는 2008년 9월 리먼 브러더스의 파산으로 금융시장이 패닉에 빠지자 5일 만에 TARP 초안을 공개했다. 이후 미국 의회를 통과하고, 세부 실행계획이 만들어지기까지 한 달도 걸리지 않았다. 은행 우선주 매입 등을 위해 3500억달러를 대통령 권한으로 즉시 실행한 것도 눈길을 끈다. 당시 집행된 4748억달러 중 67%(3200억달러)는 은행 자본확충과 금융시장 안정에 쓰였고, 27%(1282억달러)는 자동차산업·주택시장 지원에 투입됐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는 이에 발맞춰 기준금리 인하와 함께 2조3500억달러에 달하는 양적완화에 돌입했다.
이처럼 정부와 중앙은행이 호흡을 맞추는 '정중합작'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구조조정 작업이 삐걱거릴 수 밖에 없기 때문에 기재부와 한국은행도 '서로가 인식을 함께 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나섰다.
이주열 한은 총재는 전날 "(한은도) 국책은행 자본확충 협의체에 참여해 관계기관과 추진방안에 대해 충분히 논의해 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최 차관도 같은 날 "정부와 한국은행은 선제적 구조조정 과정에서 발생하는 금융불안에 국책은행 자본확충이 필요하다는 데에 인식을 같이 하고 있다"며 "중앙정부와 중앙은행이 함께 정책수단을 포괄적으로 검토해서 적절한 대책을 강구할 것"이라고 밝혔다.
◆모럴해저드 용납 없다= 정부가 구조조정 과정에서 가장 우려하는 것은 기업과 채권은행의 모럴해저드다. 구조조정 과정에서 기업 대주주나 경영진, 직원은 각자 자기 밥그릇 챙기기에만 몰두하는 모습을 반복해왔고, 채권은행도 관리부실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미국의 구조조정에서도 모럴해저드는 오점으로 남았다. TARP를 통해 최대 1000억달러를 지원받아 배드뱅크를 설립한 민관합동투자프로그램(PPIP)이 대표적이다. PPIP는 은행 부실자산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고액연봉의 은행 경영진 등에게 아무런 조건을 달지 않고 지원을 해 엄청난 비판을 받았다.
이에 따라 정부는 기업의 고통분담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다. 임종룡 금융위원장은 "대주주는 기업 부실에 대한 책임이 있다"며 "사재를 출연하거나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는 등 부실경영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기업 이해관계자의 법규 위반과 도덕적 해이가 발견되면 철저히 추적해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지게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채권은행에 대한 책임도 묻겠다는 점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정부 고위관계자는 "산업은행 등 국책은행이 대주주로 있는 기업의 부실에는 국책은행의 책임도 크다"며 "자본확충을 논의하기 전에 국책은행이 뼈를 깎는 자구노력이 선행돼야 한다"고 언급했다. 이 관계자는 "필요한 경우에는 국책은행 경영진 등에 대한 법적 책임도 묻겠다"고 전했다.
세종=조영주 기자 yjcho@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