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섬의 '스토리를 찾아서' - 희대의 악녀로 찍힌 그녀의 파주 무덤을 가다
[아시아경제 이상국 기자]
▶을사사화와 윤씨들의 전쟁=을사사화는 1545년 이 집안 가문의 소윤(小尹)인 윤원형 일파가 대윤(大尹)인 윤임 일파를 몰아낸 정쟁이다.
인종의 외삼촌이었던 윤임과 명종의 외삼촌이었던 윤원형은, 멀지않은 숙질(叔姪) 간으로 정치적 주도권을 놓고 갈등하다 피바람을 불렀다. 살아서 불구대천의 원수였지만 죽어서 모두 같은 산에 묻혀 말없이 흙이 되어가고 있으니 인간사란 멀리서 보면 이토록 허허롭다. 윤씨 가문에서는 아직도 그때의 앙금이 다 가시지 않은 듯, 대윤을 죽인 소윤을 “그 망나니”라고 혀를 차니, 육신은 사라져도 역사의 기억은 쉬 사라지지 않는 모양이다.
파주 교하읍엔 파평윤씨 묘역이 있다. 윤씨 묘역은 워낙 터가 좋아 왕릉을 쓰는데도 손색이 없으나, 100곡(100개의 골짜기)에서 딱 하나 모자라는 99곡이라 왕릉 후보에서 밀렸다고 한다. 세조비 정희왕후의 부친이 돌아가자 이곳에 묘소를 썼는데, 그는 파평윤씨 정정공파의 시조인 윤번(1384-1448)이다. 이후로 이곳은 윤씨들의 산소가 되었다.
▶ 기돗발 좋다는 정난정 묘=묘역을 돌다보면 윤원형(?-1565)의 묘가 보이고 그 뒤에 조촐한 무덤이 하나 더 있다. 조선 명종대 초반 20년을 뒤흔든 여인 정난정(?-1565)이 묻힌 곳이다. 정난정의 묘에는 기돗발이 좋다는 소문이 있어 가끔 제물을 싸가지고 와서 절을 하는 사람이 있다. 천인(賤人)으로 태어나 정경부인에까지 오른 그 인생 역전의 기운이 무덤에까지 서려있다고 믿는 것이리라. 2001년 2월에 시작하여 2002년 7월에 종영한 sbs의 ‘여인천하’는 바로 정난정의 삶과 종말을 다룬 작품으로, 정난정 역을 맡은 강수연과 윤원형 역을 맡은 이덕화, 그리고 문정왕후를 맡았던 전인화의 강한 캐릭터가 뇌리에 깊이 남았다.
정난정은 나랏일을 크게 그르친 조선의 전형적인 악녀로 묘사되어 왔다. 지탄 대상이 된 가장 큰 혐의는 윤원형이 주도한 을사사화의 배후에 그녀가 있었다는 것이다. 남편을 충동질하고 지략을 빌려줌으로써 정치적인 코치를 했을 가능성은 없지 않으나 이에 관한 구체적인 기록이나 증거는 없다. 또 하나 그녀를 죽음에까지 몰아넣은 혐의는, 윤원형의 전부인 김씨를 독살했다는 주장이다.
이런 고소를 한 사람은 김씨의 계모인 강씨였는데, 그녀는 정난정이 구슬이란 몸종(구슬이는 본부인 김씨의 종이다)을 시켜 음식 속에 독약을 넣었다고 말한다. 의금부에서 구슬이를 포함해 10여 명의 여성들을 소환해 혹독한 문초를 한다. 모진 고문을 당한 여성들은 모두 죽고 정난정의 여종인 주거리(注巨里)만 남았다는 기록이 명종실록에 나온다. 그런데 여성들이 당국이 원하는 ‘실토’를 하지 않고 죽음에까지 이른 것은 정난정의 독살 혐의를 인정하지 않았다는 얘기가 된다. 이런 정황이 오히려 정난정의 ‘악행’이 조작된 것일 수 있음을 내비치는 것일 수도 있다.
▶ 정난정은 왜 '죽일 *'이 되었나=이 여인이 당대의 유학자들의 꼭지를 돌게한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조선 특유의 성리학적 신분질서로 자리잡았던 적서(嫡庶) 차별 제도를 철폐해버린 것이었다. 정난정은 아버지(정윤겸)가 부총관을 지낸 양반이었지만 어머니가 군영에 속한 관비(官婢)인 바람에, 종모법(從母法)에 따라 천인이 되었다. 정난정을 아꼈던 문정왕후는 수렴청정 때인 1553년(명종8년) 임금을 시켜 “윤원형의 첩에게 정경부인(외명부 종1품)의 직첩을 주라”는 명령을 내리게 한다. 천인의 출신에서 일약 모든 벼슬아치 부인들의 우두머리가 된 것이다.
그녀는 그해에 남편의 힘을 빌려 서얼(庶孼)들도 과거를 보게 하는 법을 통과시킨다. 그녀의 집 앞에는 억울한 일을 당한 노비들이 몰려오기도 했다. 정난정의 이같은 ‘개혁’이 당시의 지식인들에게는 신분 질서 교란 행위로 보였을 것이다. 이것이 그녀를 공공의 적으로 만드는 한 계기가 된다.
또 하나는 숭유억불(崇儒抑佛)의 국기(國基)를 뒤엎는 불교 진흥책에 앞장 선 점이었다. 윤원형의 누나인 불교도 문정왕후의 소신에 부응한 것이다. 정난정은 승려 보우를 왕후에게 소개시켰고 승려 도첩제 등 불교의 제도를 부활하는데 일조를 한다. 그리고 스스로 불사 중창과 불교행사에 팔을 걷어붙였다. ‘연려실기술’에는 정난정이 한해 두세번씩 밥을 지어 물고기에게 던져주는 행사를 벌인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이런 난정의 불심(佛心)은 문정왕후의 마음을 얻는 매력이었지만, 유학자들에겐 이를 갈게 만드는 빌미가 된다.
▶ 윤원형을 숙주 삼아 제 뜻을 편 여인=오늘날의 관점에서 본다면 정난정은 태어나면서부터 질곡에 갇힌 자신의 입지를 뛰어난 두뇌와 판단력으로 개척해나간 사람이라 할 만하다. 남편의 힘을 활용하여 당시 상권을 장악하여 부를 축적하는 과정도 눈에 띈다. 실력자의 신임을 얻고 자기의 뜻을 펴나가는 방식도 무서울 정도로 기민하고 과감하다. 그랬기에 정치적인 소용돌이 속에서 자신의 뜻을 펴나가는 실력자로 부상할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그녀의 행위와 선택들이 정당했는지 여부는 또다른 문제이다.
그녀가 ‘악녀’로 찍힐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정쟁 속에서 피바람을 일으키며 권력을 쥔 윤형원이란 사람을 자기 야망의 숙주로 삼았다는 점과 어차피 한시적일 수 밖에 없는 ‘수렴청정’ 권력(문정왕후)에 기대어 기득권의 철학과 신념을 허무는 혁명적인 조치들을 취했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권력이 뒤집혔을 때 닥쳐오게 되어있는 역풍이, 정난정의 가치 전부를 쓰나미처럼 쓸어버린 셈이다. 1565년 문정왕후가 돌아갔을 때, 그녀의 영광은 끝이 났다. 사림은 탄핵을 시작하여 그녀를 다시 천인으로 강등시켰고, 남편 윤원형과 함께 황해도로 유배를 보냈다. 그곳에서 자신을 죽일 것을 예감하고는 스스로 음독하여 목숨을 끊는다.
윤원형 뒤에 있는 정난정의 묘는, 부부의 모양새로는 어쩐지 어색하다. ‘첩’으로서 아예 묘역에 들지도 못하는 것에 비하면 분명 대접을 해준 것이지만, 저 서먹한 ‘여인의 자리’는 정난정이 한때 차지했던 영광과 다시 급전직하한 천인을 함께 의식한 자리일 법 하다. 독배를 나눠마신 권력자 부부의 무덤 앞에 가만히 앉아보는 일 또한 인생을 음미하는 의미있는 방법이 아닐까. 바람 한 자락에 떠도는 한 자락 소설같은 이야기인가? 삶도 죽음도 롤러코스터같았던 두 인생열차가 종착한 자리이건만 풀잎 아래 흐느끼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이상국 기자 isomis@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