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와 침몰 위기
[아시아경제 뉴욕=김근철 특파원] 미국 공화당 경선의 흐름이 갈수록 고차방정식이 돼가고 있다. 아웃사이더 돌풍을 일으켜온 부동산 재벌 도널드 트럼프의 독주로 싱겁게 막을 내릴 것 같던 분위기에 변화의 조짐이 감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5일(현지시간) 치러진 '슈퍼 토요일' 경선을 앞두고 지난 2012년 대선후보인 밋 롬니 전 매사추세츠 주지사와 공화당 주류는 '트럼프 저지' 총공세에 나섰다.
효과가 있었다. 결과만 놓고 보면 거침없던 공화당 주류의 기대대로 트럼프의 독주엔 제동이 걸렸다. 이날 캔자스, 켄터키, 루이지애나, 메인 등 4개 주에서 동시에 실시된 경선에서, 트럼프는 2승을 챙겼을 뿐이다. 이번 경선의 주인공은 트럼프가 아닌 테드 크루즈 상원의원(텍사스)이었다.
크루즈 의원은 캔자스에서 48%를 득표, 23%를 얻은데 그친 트럼프를 압도했다. 메인주에서도 크루즈는 46%대 33%로 트럼프를 눌렀다.
트럼프가 1등을 차지한 루이지애나와 캔터키에서도 크루즈는 근소한 2위를 차지했다. 특히 루이지애나에선 크루즈가 트럼프와 함께 대의원을 18명씩 확보, 사실상 무승부가 돼버렸다.
슈퍼 토요일을 앞두곤 트럼프의 독주를 막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지만, 이제 사정은 달라졌다. 유력지 워싱턴포스트(WP)의 표현대로 잘 하면 트럼프를 '멈추게 할 수 있는(stoppable)' 발판이 마련된 셈이다.
하지만 공화당 주류들은 이번 결과에 환호할 수가 없다. 뒷맛은 트럼프의 승리만큼이나 씁쓸할 것 같다. 트럼프에 제동을 건 것은 좋지만 그 주역이 크루즈 의원이기 때문이다.
크루즈 의원은 강경보수 성향의 풀뿌리 정치 조직 '티파티'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있다. 티파티는 공화당의 든든한 버팀목이기도 하지만 강경 보수 일변도로 치달으면서 공화당의 주류를 곤혹스럽게 해왔다. 이들의 강경 목소리에 휘둘려 공화당이 여론의 참담한 역풍을 자초한 대표적 사례가 지난 2013년 셧다운(정부폐쇄) 사태였다.
이후에도 티파티는 공화당 지도부를 집요하게 압박, 강경 노선을 요구했고 결국 이들의 등쌀에 존 베이너 하원의장마저 짐을 쌌을 정도다.
그런 티파티와 강경한 기독교 복음주의 유권자들이 키워온 비밀 병기가 바로 크루즈 의원이다. 실제로 크루즈는 존 메케인 상원의원 등 주류 그룹이 일반 여론을 의식해 유연한 원내 전략을 추진할 때마다 제동을 걸어왔다. 사실 공화당 주류 입장에선 트럼프 다음으로 피하고 싶은 후보가 크루즈 의원인 셈이다.
롬니 전 주지사나 공화당 주류들이 은근히 밀었던 후보는 마르코 루비오 상원의원이었다. 하지만 루비오 의원은 이번 슈퍼 토요일 경선에서 참패를 했다. 그는 4개 지역 모두에서 트럼프와 크루즈에 한참 쳐진 3위에 머물렀다. 루비오는 물론 그를 밀었던 공화당 주류에게도 충격적인 상황이다.
트럼프는 이를 놓치지 않았다. 경선 직후 루비오의 후보 사퇴를 요구하며 크루즈와의 일대일 경선을 희망했다.공화당 주류의 적자를 '찍어내서' 경선 개입의 여지를 줄이겠다는 계산이다.
공화당 주류로선 이제 오는 15일 치러지는 '미니 슈퍼 화요일' 경선에서 루비오의 기적 같은 반등에 희망을 걸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됐다. 이때 루비오가 대항마로 부활하지 못한다면 크루즈 의원 지지를 놓고 '반(反) 트럼프 연합전선'도 분열될 가능성이 높다. 공화당 주류와 루비오에게 운명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뉴욕=김근철 특파원 kckim100@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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