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같은 나이에 일찍 세상을 떠나 더욱 애석함을 자아내는 두 인물이 있다. 나라의 명운이 걸린 중차대한 시기에 똑 같이 49세에 작고함으로써 '10년씩만 더 살았더라면' 하는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그 두 분은 바로 율곡 이이와 정조 대왕이다. 두 사람의 이른 죽음은 우리로 하여금 만약 그들이 그 나이에 죽지 않았더라면 그 이후 역사의 전개는 매우 달라지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조선과 한국이 겪어야 했던 많은 수난과 불운도 없지 않았을까, 라는 탄식에 빠지게 한다.
1536년 출생한 율곡은 49세 되던 1584년 정월 16일에 눈을 감았다. 임진왜란 발발을 8년 앞둔 때였다. 논란이 되고 있긴 하지만 '10만 양병설'을 주장했다는 설이 나돌 만큼 율곡은 생전에 늘 국난에 대비하라는 환난의식을 불러 일으켰기에 그의 죽음은 곧 국방책의 큰 좌절이었다. 또 만언에 이르는 상소인 만언봉사(萬言封事)와 시무육조(時務六條)로 대표되는 개혁의 실패였으며 당쟁을 중재하려던 중심인물의 상실이었다. 49세 율곡의 죽음은 조선의 몰락과 패퇴의 한 원인이었다.
1800년 6월28일의 정조의 '승하'도 갑작스런, 너무도 이른 나이의 죽음이었다. 25세에 왕위에 올라 재위 24년째였을 때의 급사였고, 이로써 영정조 70여년의 조선부흥은 사실상 막을 내리고 말았다. 6일 뒤인 7월4일 정조의 아들 순조가 11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했다. 실록 등은 순조에 대해 "검소하고 덕이 높으며 학문을 사랑한 왕"으로 서술하고 있으나 미처 제왕 수업을 마치지 못한 '소년 왕'은 정조의 조선 중흥정책을 이어나갈 힘이 없었다. 아버지인 정조가 10년만 더 살아 태종이 세종을 위해 그랬던 것처럼 후계자의 권력 기반을 좀 더 닦아 놓았다면 순조의 치세는 크게 달라졌을지 모른다. 19세기 조선의 역사, 20세기로 이어지는 구한말의 역사도 다르게 전개되었을지 모른다.
역사는 이렇게 두 사람의 죽음에 안타까운 가정을 하게 만든다. 분명 두 사람의 죽음은 그들 죽음 이후의 역사를 생각할 때 49의 향년조차 '요절'로 생각게 한다. 그런데 우리의 애석한 마음을 접어두고 살펴본다면 두 사람의 죽음을 과연 매우 비정상적일 정도의 때 이른 죽음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지는 않다. 율곡은 20대에 관직에 진출한 이후 이미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펼쳐 보였다. 정조는 죽기 몇 년 전부터 아들이 15세가 되면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나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두 사람이 희대의 천재이며 제왕의 지위였던 특별한 사정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조선시대의 평균수명이나 고위공직자들의 연령 등을 보더라도 두 사람은 이미 공인으로서 원숙기에 접어들었던 나이였던 것이다. 그러니 두 사람의 죽음은 그들이 좀 더 살아 이뤄냈기를 바라는 과제들을 생각할 때의 비통한 심정과는 별개로 너무도 이른 나이였다고 할 수는 없다.
오히려 사회적 삶의 단명은 지금 우리 앞에 특징적으로 펼쳐지는 풍경이다. 40대 후반, 50대에만 들어서면 퇴직을 걱정해야 하는 지금이야말로 너무도 때 이른 (사회적) 죽음을 맞는 시대다. 정치권에서는 다선 의원들에 대한 불출마 요구 속에 50대 초반의 의원조차 후진을 위해 자리를 양보한다는 얘기를 하고 있다. 신구(新舊)를 나누는 기준 연령이 이렇게 내려와 있는 것이다. '100세 인생'이란 말이 나올 정도로 수명은 늘어나고 있는 것과는 정반대되는 현상이다.
그런가 하면 한편에선 나이와 연륜이 권력이 돼 있다. 일부 사람들은 나이에 비례해 호봉과 지위가 올라간다. 한편에선 나이가 약점이지만 한편에선 나이가 권력이다. 문제는 나이의 많고 적음이 아니다. 나이의 다소에 따라 신구(新舊)를 구분할 것도, 이른바 '꼰대'냐 아니냐로 나눌 것도 아닌 것이다. "청춘이란 인생의 어떤 한 시기가 아니라 마음가짐을 뜻한다"고 한 사무엘 울만의 시에서처럼 '신선한 정신과 용기, 안이함을 뿌리치는 모험심'이 청춘의 조건이라면 그것이 또한 우리 사회 권력과 책임을 맡을 기준이어야 할 것이다.
이명재 논설위원 prome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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