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운동 등 흥미거리 의도적 배제...시종일관 자연 VS 인간의 구도 유지
[아시아경제 이종길 기자]우리 민족에게 호랑이는 특별하다. 까마득한 옛날을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이라고 한다. 각종 설화에도 단골손님으로 등장한다. 1988년 서울올림픽의 마스코트는 '호돌이'였다. 그러나 우리 영화에는 자주 나오지 않았다. 김한민(46) 감독의 '최종병기 활(2011)'에 등장하지만 깜짝 출연 수준이었다. 컴퓨터그래픽으로 구현하기도 어렵지만 한반도에서 사라진 지 약 100년이 지나 친근함이 줄었다.
영화 '대호'는 호랑이의 마지막 발자국을 쫓다 함께 자취를 감춘 포수를 조명한다. 자연에 순응하며 전통적인 사냥 방법을 고수하는 천만덕(최민식)과 산군으로 불리던 호랑이가 벼랑 끝에 내몰린 처지를 교묘하게 겹쳐놓는다. 사실 호랑이는 조선 후기부터 개체가 급감했다. 인구가 늘어 삼림이 줄었고 조선 정부는 대규모로 사냥했다. 일제강점기에는 해수구제 정책이 본격화되면서 '학살'로 전환됐다. 일본은 크게 세 가지를 노렸다. 그들의 용맹함을 과시하고, 조선인의 마음을 얻으며, 호랑이의 기질을 닮은 조선의 얼과 혼을 없애려고 했다.
박훈정(41) 감독은 이 메시지를 담아내기 위해 정공법을 택한다. 항일운동 등 국내 관객의 흥미를 배가할 만한 자극적인 요소들을 배제하고 시종일관 이야기를 담백하게 풀어간다. 이런 전개는 긴장감 넘치는 흐름에 익숙한 관객을 다소 불편하게 할 수 있다. 더구나 '대호'는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할 여지가 충분하지만 전체 신의 85%가량을 산에 할애한다. 호랑이를 사냥하려다 실패하는 과정이 여러 차례에 걸쳐 반복되고, 칠구(김상호) 등 일부 캐릭터들의 성격도 명확하게 구분하지 않았다.
박 감독은 "장사를 조금 더 해보자고 덤벼들었다면 일본군에게 누르스름한 군복만을 입히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대부분의 상업영화들은 이런 이야기에서 보다 비현실적이고 악랄한 플롯을 삽입해 갈등을 증폭시킨다. 하지만 박 감독은 극 중반까지 절제를 지킨다. 그는 조선과 일본의 대립을 말하지 않는다. 자연과 자연을 욕망이 대상으로 여기는 자들의 충돌이다. 일본군이 자연을 침범하는 세력으로 등장하지만 우리민족의 가치관이 자연과의 공존이었다는 점에 더 초점을 맞춘다.
그런 의미에서 조선포수대의 리더 구경(정만식)은 꽤 매력적인 캐릭터다. 천만덕과의 의견 대립으로 악인처럼 보일 수 있지만 일본의 앞잡이는 아니다. 나라를 잃은 암흑기에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옛 가치관을 스스로 파괴하는 자다. 그에게 호랑이는 복수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큰돈을 안겨주는 사냥감이다. 이 야심은 굳이 일본군이 아니더라도 일제강점기에 욕망의 시대가 열렸음을 보여준다.
박 감독은 이 메시지를 느긋한 호흡으로 전한다. 과감한 생략이나 빠른 편집 없이 캐릭터들의 감정을 겹겹이 쌓고, 그렇게 쌓인 힘으로 후반 전개에 탄력을 가한다. 그 덧칠에서는 출발선부터 일관해온 담백함이 발견된다. 그래서 '대호'는 생계형 포수로 등장하는 칠구를 닮았다. 일본군을 싫어하지만 먹고 살기 위해 산에 오르는 칠구는 관객과 비슷한 위치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천만덕을 향한 존경심을 드러낸다. 이 이야기의 화자라고 할 수 있다. 박 감독은 "일제강점기를 객관적으로 말해 줄 수 있는 보편적인 인물이라서 김상호(45) 씨에게 '튀는 연기를 경계해달라'고 당부했다"고 했다.
제작진이 이런 모험을 할 수 있었던 건 출중한 컴퓨터그래픽으로 완성된 호랑이 덕이다. 세계적으로 호랑이를 다룬 영화로는 '투 브라더스(2004)', '라이프 오브 파이(2012)' 정도가 꼽힌다. 전자는 호랑이를 직접 촬영했고, 후자는 1000억 원을 들여 컴퓨터그래픽으로 구현했다. '대호'는 90억 원가량 썼지만 '라이프 오브 파이' 못잖은 그래픽을 자랑한다. 백미는 야외 낮 장면. 보통 이런 영상은 실내 세트에서 촬영한 실사를 컴퓨터그래픽과 합성하는데 조명 값의 차이가 커 어색해 보이기 쉽다. '대호'는 산에서 촬영한 실사에 컴퓨터그래픽을 그려 넣는 몇 배의 수고를 강행하며 호랑이를 털끝까지 섬세하게 표현했다. 단순한 표정에는 65인조 오케스트라ㆍ40인조 소년합창단 등의 소리를 더해 의인화에 가까운 분위기를 만들었다.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