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조태진 기자]"성장 유망한 강소기업들이 대거 한계기업으로 몰릴 판이다." 최근 만난 모 중소기업 대표가 금융당국의 한계기업 구조조정 방침을 두고 내뱉은 일침이다.
진웅섭 금융감독원장은 지난달 시중은행장들과 만나 "회생가능성이 없는 한계기업을 신속히 정리해야 해달라"고 주문했다. 임종룡 금융위원장도 비슷한 시기에 엄정한 기업신용평가, 기업 자구노력을 전제한 경영정상화, 신속한 구조조정을 강조하면서 부실기업 솎아내기를 서둘러줄 것을 은행권에 당부하고 나섰다.
기업여신 평가 시스템과 한계기업 정리 유도를 위한 인센티브 제공 방안까지 논의되고 있다고 한다. 사정이 이렇자 기업에 여신을 제공하는 은행들은 비상이 걸린 상태다. 당장 올해 안으로 자체 한계기업 판정 기준을 만들고 기준 미달 기업에 대해 자금 회수에 나서려는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다.
금융권 한 관계자는 "금융당국이 불과 석달전만해도 경기 장기침체 기간 기업경영을 옥죄는 자금 운용을 경계해줄 것을 주문했는데 태도가 갑자기 바뀌어 당황스럽다"고 말했다. 은행권이 우왕좌왕하며 여신 회수 기준을 손질하고 나서면서 재무구조가 열악한 중소기업은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모 전자부품업체 대표는 "중소기업의 경우 담보없는 여신은 거의 없는 상황이고 우수한 기업이라고해도 매출의 40% 이상을 대출해주지 않는다"며 "대부분 기업들이 전년보다 매출이 떨어져 여신 한도가 대폭 줄어든 상황인데 그러한 사정들이 반영되지 못할 경우 한계기업이라는 오명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곳이 적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예컨대 전년 100억원 매출을 올린 기업이 40억원을 대출받았는데 올해 80억원으로 떨어지면 한도가 32억원으로 줄어들게 되고 기존 대출금액이 여신 한도 초과로 이른바 '좀비기업' 신세로 전락하게 된다는 것이다. 금융당국의 규제 완화를 기대했던 상당수 중소기업들이 되레 강화된 여신 관리에 당혹감을 감출 수 없게 되는 이유다.
한국 경제의 '심장'인 제조업 분야에 대한 우려는 시간이 갈수록 커지고 있는 상황이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해 제조업 매출액 증가율은 -1.6%로 집계됐다. 제조업 매출액이 전년보다 감소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와같은 불황 속에서 '옥석 가리기' 작업을 밀어붙인다면 제조업이 더욱 침체하는 악순환이 이어질 수 있다.
일시적인 매출감소 때문에 중소기업이 겪는 서러움은 이 뿐만이 아니다. 중소기업계 한 관계자는 "매출이 줄어들게 되면 법인세가 적어지게 되는데 세수 확보에 비상이 걸린 세정당국이 간이조사를 명목으로 사실상 전수조사 수준의 세무조사를 실시하는 기업이 적지 않은 것으로 안다"며 "거래관계에 있는 기업에 주는 이미지 타격 등 영업활동에 적잖은 마이너스 요인이 될 것"이라고 우려감을 표시했다.
정부는 창조경제 밑그림으로 중소벤처기업 활성화를 기치로 내걸었다. 청년층의 취업난의 대안으로 창업도 적극적으로 장려하고 있다. 하지만 자금 조달을 금융권 대출에 상당부분 기대어야 하는 초기 기업의 성장을 심각히 가로막을 수 있는 금융당국의 조치는 유감스럽다.
금융권에 한계기업과 성장기업을 구분할 수 있는 면밀한 기준을 정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줘야함은 물론 별도 여신 규제를 적용하는 등 속도 조절의 미학이 필요한 때다.
조태진 기자 tjjo@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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