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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훈 칼럼]고속도로 휴게소 추로스 가게의 청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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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훈 칼럼]고속도로 휴게소 추로스 가게의 청년들 박명훈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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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맛은 쉽게 길들여 지지 않는다. 식성은 한 사람이 걸어온 과거와 추억의 퇴적이다. 그 끝자락이 대개 '엄마의 밥상'으로 귀결되는 이유다. 고속도로 휴게소를 들를 때 나는 습관처럼 호두과자 매장을 찾는다. 호두과자에서는 오래 전 열차여행의 추억과 '천안명물'을 외치던 열차 안 홍익회 판매원의 목소리가 묻어난다.


비슷한 추억을 가진 사람들이 많은 때문일까. 휴게소 호두과자 가게는 늘 손님으로 붐빈다. 갓 구워낸 호두과자를 한 입 물었을 때 입안으로 번지는 팥소의 달콤함, 탁 하고 씹히는 호두의 감촉. 미각으로 전해지는 소소한 행복도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이다.

그렇게 호두과자 마니아라 자부하는 내가 얼마 전 호두과자를 외면하는 일을 저질렀다. 추석 귀경 길 휴게소에 들어설 때만 해도 목표는 분명했다. 한 봉지 호두과자. 사단은 인파로 붐비는 휴게소 통로를 걸어가다가 눈에 띈 간이점포의 간판에서 비롯됐다. 처음 보는 추로스 가게에 큼지막하게 붙어 있는 '청년창업매장'.


청년창업이란 단어가 가슴을 쿵하고 때렸다. 발길이 저절로 멈췄다. 체감실업률 20%를 웃도는 이 땅의 청년들이 고속도로 휴게소까지 진출했구나. 매장에서는 대학생 정도로 보이는 젊은이 둘이서 추로스를 만들어 팔고 있었다. 장사는 잘될까. 졸업은 했을까. 초콜릿 토핑으로 추로스를 주문하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한동안 지켜봤다.

손님이 없지는 않았으나 썩 잘되는 것 같지는 않았다. 호두과자, 회오리감자, 반건조 오징어구이에서 냉커피까지 낯익은 경쟁자들은 훨씬 우월한 자리에서 손님을 부르고 있었다. 추로스의 상품력은 약해 보였고 젊은이들은 여리고 수줍었다. 장사를 하려면 얼굴이 더 두꺼워야 할 텐데, 임대료나 제대로 내고 있을까, 공연한 걱정이 앞섰다.


개인적으로 추로스엔 스페인 여행길의 추억이 담겨 있다. 마드리드의 유명한 초코테리아 '산 히네스(San Gines)'를 찾았을 때 입구에는 '1894'라 새겨진 간판이 가게의 오랜 연륜을 과시하고 있었다. 스페인 전통식품인 추로스를 커피 잔에 담긴 초콜릿에 듬뿍 찍어 먹으며 허기를 달래던 그 때의 여정이 떠올랐다. 내가 휴게소에서 호두과자 대신 추로스를 택한 것은 청년창업매장이라는 특별한 유인에 '스페인의 추억'이 더해진 결과다. 누구나 그런 느낌과 경험을 가지고 있지는 않을 터이다. 입맛은 쉽게 길들여지지 않는 법. 추로스의 맛에 익숙해져서 매점을 찾는 손님이 과연 얼마나 될까.


알고 보니 고속도로 휴게소 청년창업매장은 한국도로공사가 사회공헌 차원에서 도입한 회심의 작품이었다.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가진 청년들을 지원한다는 명분으로 '청년창업 창조경제 휴게소' 계획을 세워 지난해 7월 이후 전국 9곳 휴게소에 29개 매장의 문을 열었다. 도로공사는 창업자들에게 임대료 감면과 인테리어, 컨설팅, 홍보 등을 지원했다. 총 임대료 감면액만도 3억1500만원에 달했다. 청년창업매장은 정부의 2014년 공기업 경영평가에서 호평을 받아 도로공사가 우수등급(A)을 따내는 데 공신이 됐다. 그러나 청년매장의 운영 결과는 초라했다. 전체의 절반이 넘는 17개 매장이 벌써 폐업했다. 국회에서는 미숙한 사업에 예산만 낭비했다는 질타가 쏟아졌다.


청년창업 휴게소 사업의 사실상 실패는 시혜성, 이벤트성 청년사업의 한계를 드러낸 상징적 사례다. 파격적인 특혜로 '쉬운 장사'를 권하면서 '창의적 젊은이의 성공' 운운하는 것부터 자가당착이다.


난무하는 청년 일자리 사업의 대부분은 허울 좋은 빈 수레다. 지난해 448억원을 지원한 정부의 청년해외취업 사업만 해도 실제 취업성공은 1100명에 불과했다. 1인당 4000만원의 세금을 쏟아 부은 꼴이다. 이 같은 취업 사업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다른 한편에서는 '현대판 음서제'니 '고용세습'이니 하는 특채비리가 드러나 청년들을 절망케 한다.


진정 청년의 장래를 생각한다면 제대로 된 일자리를 만들고 제대로 훈련시켜야 한다. 잠시 달콤한 사탕으로 달래려 할 게 아니라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강인한 인재를 길러내야 한다. 박근혜 대통령의 제안으로 번지고 있는 청년희망펀드 또한 예외가 될 수 없다.






박명훈 주필 pmhoo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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