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널리스트 너섬(여의도) 탈출기
리서치 인력 4년간 300명 짐싸
'조사분석' 보다 '법인영업지원'에 역할 치우쳐
벤처캐피털·타업종으로 이직 속출
[아시아경제 조유진 기자] # "너 이놈. 네가 주식 전문가야. 내츄럴엔도텍이 성장가치가 최고라며. 3개월 만에 반토막이 났는데 이제 어쩔꺼야. 내 돈 1000만원 어쩔거냐고".
증권사 애널리스트 A씨는 자신이 쓴 보고서를 보고 투자에 나섰다가 손실을 봤다는 투자자들의 항의전화에 시달리느라 업무가 마비될 지경이다. 최근에는 한 코스닥 업체에 기업탐방을 요청했다가 보기좋게 퇴짜를 맞았다. 신기술에 관한 정보를 공개하는 것이 불편하다는 이유에서다.
제약ㆍ바이오 업종을 담당하는 대형사 애널리스트 B씨는 최근 벤처캐피탈 투자심사역으로 자리를 옮겼다. B씨를 포함해 올 들어서 여의도를 떠난 제약ㆍ바이오 담당 애널리스트는 10대 증권사에서만 모두 4명이다. 제약ㆍ바이오 뿐만 아니다. 자동차, 인터넷, 은행ㆍ증권업종 등 전방위로 리서치를 떠나고 있다. 주로 바이사이드(자산운용)로 자리를 옮기거나 아예 여의도를 떠나 벤처캐피털로 이적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증권가가 때아닌 리서치 인력 기근에 시달리고 있다. 올들어 제약ㆍ바이오 업종 담당 애널리스트들의 인력 이탈이 두드러진다. 제약ㆍ바이오 업종은 올 상반기 증시를 주도하며 활황기를 보냈지만 담당 애널리스트들은 그 수혜를 비켜간 모습이다.
10일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이날 현재 협회에 등록된 62개 증권사 소속 애널리스트(금융투자분석사)는 1133명이다. 2011년 말 1432명이었던 애널리스트 수는 4년만에 300명 가까이 짐을 쌌다. 국내 10대 증권사 중 7곳이 2011년 대비 적게는 2명에서 많게는 20명의 애널리스트가 자리를 옮겼다.
한국투자증권, 하나금융투자, 미래에셋증권, 키움증권 등 주요 증권사 4곳의 제약ㆍ바이오 담당 애널리스트는 올들어 리서치를 떠났다. 각각 벤처심사역으로 이적하거나 다이와증권사 등 외국계 증권사로 이동했다. 한국투자증권은 지난 7월 인력 이탈 후 현재까지 후임을 물색중이다.
유안타증권 자동차ㆍ운송업종을 담당하던 남경문 애널리스트는 최근 투자운용팀으로 자리를 옮겼다. 유안타증권의 자동차ㆍ운송업종 담당은 현재 공석이다. 중소형 증권사 애널리스들의 자리 이동도 심상치 않다. 박연채 키움증권 리서치센터장은 지난 7월 기관영업으로 자리를 옮겼고, 금융업종을 총괄하던 서영수 애널리스트는 여의도를 떠났다. 동부증권 은행ㆍ증권업종을 담당하던 홍헌표, 조성경 연구원도 아예 기획 업무로 이동했다.
통상 리서치센터는 '비용부서'로 인식돼 구조조정의 칼끝이 가장 먼저 향한다. 지난해 여의도에 불어닥친 구조조정 강풍에도 리서치센터 인력 46명이 빠져나갔다. 이 때문에 남아있는 애널리스들의 업무강도는 높아졌다. 애널리스트들은 '회사에서 요구하는 역할이 과거보다 많아지고 있다'고 입을 모은다. 단적인 예로 애널리스트 1인당 담당하는 종목 수가 많아졌다. 과거에는 증권, 보험, 등 각 섹터별로 세분화해 각각 담당 애널리스트가 있었지만 지금은 이런 사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한 명의 애널리스트가 2~3개의 업종을 담당하는 건 기본이다.
인력 이탈은 애널리스트 위상 격하와 무관치 않다. C증권사 애널리스트는 "조사분석이 주요 업무인 애널리스트들의 역할이 '법인영업 지원'으로 치우치고 있다"며 "증권사 돈벌이가 어려워지면서 그들의 주요 고객인 기관에 대한 영업지원 역할을 강화할 수 밖에 없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증권사 애널리스트는 이런저런 영업관계에서 '을(乙)'일 수 밖에 없는 위치다. 자칫 '매도'를 외쳤다가는 기업과 투자자들에게 무차별적인 비난을 받아야 한다. 대기업 상장사의 경우는 매도 보고서를 낸 증권사는 아예 IR행사에서 배제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는 후문이다.
기업탐방 자체를 꺼리는 상장사들도 크게 늘어나는 등 분석 환경도 열악해졌다. D증권사 애널리스트는 "제약ㆍ바이오업계 삼성전자로 통하는 한미약품조차 최근까지 기업탐방이 어려웠었다"면서 "특히 기업탐방을 위주로 하는 스몰캡 종목들의 경우 탐방과 자료공개를 꺼리는 상장사가 많아 어려움이 많다"고 말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보고서 질적 저하 논란도 불거진다. 특히 실적 보다 성장성으로 가치평가를 해야 하는 업종에서는 이같은 현상이 두드러진다. E증권사 제약ㆍ바이오 담당 애널리스트는 "얻을 수 있는 정보가 제한적이다 보니 돌려쓰고 베껴쓰는 것이 관행처럼 돼 버렸다"면서 "특히 특수한 분야나 기술을 다루는 애널리스트들은 정보 제약으로 기업 IR담당자에게 휘둘리기 십상"이라고 토로했다. 결국 부실 보고서는 애널리스트들의 위상을 떨어뜨리는 악순환을 낳는다고 덧붙였다.
조유진 기자 tint@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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