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경제가 위기에 빠지는 순서가 있다. 길은 다양할 수 있지만 겪는 과정은 비슷하다.
우선 국가채무가 증가한다. 이어 국가채무를 감당하기 버거울 정도로 경제성장 둔화가 이어진다. 성장둔화는 세입기반을 약화시킨다. 세수감소는 재정적자를 확대시키고 다시 국가채무 증가로 이어진다. 못 갚을 정도로 빚이 불어나면 결과는 뻔하다. 일본과 남유럽 국가들이 남긴 경제침체의 상흔(傷痕)이기도 하다.
침체의 항로를 향할 때 닻(anchor)을 올리는 것은 국가채무의 증가인데 여기에는 정부의 전략적 판단이 반드시 동반한다.
일본은 1992년부터 2000년까지 9차례의 경기부양책으로 총 123조1000억엔을 투입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에는 총 76조8000억엔을 썼다. 최근 엔고대응과 동일본 대지진 복구를 위해 16조3000억엔을 다시 투입해 총 200조엔을 훌쩍 넘는 천문학적 재정을 동원했다. 그 결과 1989년 버블붕괴 직전 48.9%였던 일본 정부 부채가 2010년께부터 200%를 가볍게 넘어서게 된다.
일본 정부는 버블경제가 붕괴 조짐을 보이자 이를 경기 사이클상의 불황으로 인지했다. 재정을 동원해 '깔딱고개'만 넘기면 다시 상승전환하리라 믿었다. 심대한 오판이었다.
그러다 보니 정말 의미 있는 재정동원은 1998년 7월 출범한 오부치내각에서야 가능했다. 오부치 총리는 당시 42조엔을 투입했다. 연평균 10조엔 규모에서 대규모 경기부양책으로 방향을 전환한 것이다.
일본이 '잃어버린 20년' 기간 중 상실을 털고 희망을 노래한 적도 있다. 2002년 2월부터 2007년까지 12월까지 약 6년에 걸쳐 최장기 호황을 맞이한 것이다.
고이즈미 총리(2001∼2006년)가 그 중심에 있었다. 고이즈미 총리는 국민 인기를 기반으로 구조개혁에 착수했다. 그는 '개혁 없이 성장 없다'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정치적 포퓰리즘 상징인 공공사업 예산 삭감, 우정사업 민영화와 특수법인 개혁 추진 등 각종 규제도 철폐했다. 차기 총리가 이 개혁조치를 이어가기보다 분배정책에 치중하면서 경제부활은 물거품이 됐다.
정부가 내년도 예산안을 내놨다. 가장 마음 쓰이는 부분은 우리나라 국가채무가 내년에 처음으로 국내총생산(GDP)대비 40%를 넘는다는 점이다. 기획재정부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한국만큼 재정건전성이 좋은 나라가 없다고 자신했다는 것도 불길하다.
언급한 대로 디플레이션의 늪에 빠지기 전 일본 국가채무는 40%대였다. 스페인의 GDP 대비 국가채무도 위기진입 전이던 2007년에 36%에 불과했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숨겨진 빚이 만만치 않다. 작년 2월 기획재정부는 정부와 비(非)금융 공기업의 빚을 모두 합친 우리나라 공공부채가 821조원(2012년 기준)이라고 발표했다. GDP대비 64.5%다. 여기에는 국민연금이 보유한 국채, 공사채권 물량과 금융 공기업 채무가 빠졌다. 공무원ㆍ군인연금 지급부담이나 정부가 떠안을 수 있는 보증채무 중 일부도 포함되지 않았다.
내년도 예산안 중 30% 이상이 복지관련 예산이고 이는 초고령화 사회로 진입하며 급속히 늘어나게 된다. 빼도 박도 못하는 경직성 예산이다. OECD 회원국 중 재정건전성 1위라고 정부가 자신할 처지가 아니다. 올해 추가경정예산을 편성했지만 3% 경제성장률 달성은 물 건너 간 것으로 보인다. 일본처럼 '이번만 넘기면 된다'는 생각에 향후 몇 년을 보내면 '냄비 속 개구리' 신세가 될 게 뻔하다.
일관되고 강력한 개혁 리더십이 필요하다. 고이즈미 총리가 6년간 내각을 이끌며 일본경제의 부활을 지휘했듯, 우리에게도 줄기차게 구조개혁을 이끌어 나갈 수장이 필요하다. 여름휴가를 자신의 지역구에서 보낼 수밖에 없는 경제관련부처 장관들이 국회로 돌아간 후 박근혜 대통령이 누구에게 한국경제의 방향타를 맡길지가 한국경제의 명운을 좌우할 것이다.
박성호 정치경제부장 vicman1203@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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