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박병희 기자] 그리스 사태를 파국으로 몰고 있는 주범이라는 비난을 받고 있는 알렉시스 치프라스 그리스 총리가 또다시 승부수를 던졌다.
치프라스 총리는 29일(현지시간) 그리스 공영방송 ERT와의 인터뷰에서 "어떤 결과가 나오든 국민투표를 존중할 것"이라면서 "투표에서 '예스(협상안 찬성)'가 나오면 사퇴하겠다"고 말했다.
내달 5일(현지시간) 국민투표와 자신의 거취를 연계시킨 것이다. '배수진'이다. 배수진은 전쟁에서 궁지에 몰린 장수가 선택하는 최후의 수단이다. 역설적으로 치프라스의 승부수는 그리스 사태가 '그렉시트(그리스의 유로존 탈퇴)'라는 최악의 상황을 면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현지 여론조사에서는 그리스 국민들이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와 유럽중앙은행(ECB), 국제통화기금(IMF)이 지난 25일 유로그룹(유로존 재무장관 협의체) 회의에서 제안한 협상안을 수용해야 하느냐'는 내달 5일 국민투표 질문에 대해 '예'를 택할 가능성이 높게 나오고 있다.
이 경우 그리스 사태는 그렉시트라는 최악의 상황을 면할 수 있다. 물론 그리스가 사실상 디폴트(채무 불이행)에 빠지는 상황은 피하기 어렵다. 하지만 국제 채권단 수장들은 그리스 국민들이 긴축 제안을 수용한다면 여전히 그리스를 돕겠다는 입장이다. 디폴트 사태도 충격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크다.
장-클로드 융커 EU 집행위원장은 "그리스에 배신당한 느낌이지만 협상의 문은 여전히 열려있다"며 그리스 국민들에게 투표에서 찬성할 것을 조언했다. 융커 집행위원장은 "여전히 그리스의 유로존 탈퇴는 선택지가 아니라고 믿는다"며 채권단이 그리스에 최종적으로 제안한 내용은 좀 더 공정함을 담고 있다고 강조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역시 기자회견에서 국민투표 이후 협상 재개 가능성을 언급했다. 메르켈 총리는 이날 독일 정당 대표들과 그리스 문제를 논의한 후 "내달 5일 그리스 국민투표 후 그리스와 협상을 준비하고 있다"며 타협안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메르켈 총리는 이날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전화 통화하고 그리스 문제를 논의했다. 메르켈 총리와 오바마 대통령은 그리스 문제를 유로존 안에서 해결해야 한다는 데 입장을 같이 했다.
크리스틴 라가르드 IMF 총재도 앞서 그리스 국민들이 국민투표에서 유로존 잔류를 선택한다면 그에 대한 대답은 다시 한 번 노력해보자가 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리스 은행이 문을 닫고 자본통제가 이뤄진 첫날인 29일 아시아시장에 이어 미국과 유럽 주식시장이 급락했다. 미국 스탠더드앤푸어스(S&P)500 지수는 전 거래일 대비 2.09% 하락했다. 유럽 증시 낙폭은 더 컸다. 독일 DAX30 지수는 3.56%, 프랑스 CAC40 지수는 3.74% 급락했다. 독일 국채 10년물 금리는 전 거래일 대비 0.13%포인트 급락(국채가격 상승)한 0.80%를 기록해 안전자산으로 투자심리가 쏠리고 있음을 보여줬다.
이날 그리스 정부 관리들은 30일까지 IMF에 갚아야 할 채무 15억5000만유로를 상환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국제 신용평가사들은 잇달아 그리스 신용등급을 하향조정했다. S&P는 그리스 국가 신용등급을 'CCC'에서 투기(정크) 등급인 'CCC-'로 낮췄다. 피치는 자본 통제를 이유로 그리스 4대 은행의 신용등급을 '제한적 디폴트(RD)' 등급으로 강등했다.
박병희 기자 nut@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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