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고향에서는 아무도 모르지만 멀리 타국에서 이름을 떨친 사람들이 있다. 1653년 상선을 타고 나가사키로 향하던 중 난파돼 제주도에 표류, 13년 동안이나 조선에 억류된 네덜란드인 하멜이 그렇고, 흑선을 끌고 와서 대포로 일본을 개국시킨 페리 제독이 또 그렇다. 일본의 민영 TV가 실제로 인터뷰해 보니 일본인은 '구로부네(흑선)' 페리 제독으로 이름을 기억해 주었지만 그의 조국 미국에서는 아무도 기억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유명한 일본인 가쓰라 타로와 미국인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는 어떨까. 이름이 좀 낯설다고? 아마 그럴 것이다. 그러면 두 사람의 성만을 따서 '가쓰라, 태프트'라면 어떤가. 이제야 무릎을 치며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그렇다. 우리에게 너무도 악명 높은 '가쓰라, 태프트 밀약'의 주인공이 바로 이 두 사람이다. 일본 외상이었던 가쓰라와 미 육군장관인 태프트는 1905년 7월27일 도쿄에서 만나 이 밀약을 맺었다.
두 사람이 맺은 밀약에는 '일본이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인정하는 대신 일본의 조선 지배를 묵인한다'는 내용으로 정리되어 있었다.
그런데 가쓰라, 태프트 밀약이 조약이나 협약이 아니라 면담(회담이 아니다) 당사자의 메모에 불과한 것이라면 어떨까. 더구나 그 메모가 그리 대단한 가치가 없는 것이라면. 최근 재미있는 논문을 발견했다. 1959년 시카고 대학에서 발간한 '모던 히스토리 저널'이라는 학술지에 레이먼드 에스터스라는 학자가 쓴 '태프트-가쓰라 조약:실제 또는 허구?' 라는 논문이다.
그는 여기서 가쓰라, 태프트 밀약은 허구라는 놀라운 주장을 펼치고 있다. 가쓰라, 태프트 밀약은 협정이나 조약이 아니라 당사자가 작성한 비망록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 메모는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테오도어 루즈벨트에게 전달되었지만 발견된 곳은 미 국무성 외교문서 보관소가 아닌 루즈벨트 개인 서류 더미 속에서였다. 비망록을 전달받은 루즈벨트는 태프트에게 '당신이 전달한 이야기는 내 생각과 일치한다'고 확인해 주었을 뿐이다. 또 태프트는 조약을 맺기 위한 루즈벨트의 특사도 아니었다. 사실 태프트 방일 4개월 전에 루즈벨트는 리처드 베리 같은 저널리스트를 도쿄에 보내 조선과 중국 다롄에 대한 일본 지배를 인정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었다.
더 놀라운 사실은 가쓰라와 태프트의 면담 내용이 도쿄에서 발행되는 친정부계 신문 '고쿠민'에 의해 보도되었다는 것이다. 고쿠민이 일본정부 내 소식통을 인용해 두 사람이 만나 대화한 내용을 보도했다는 것이다. 일본에서는 신문에까지 보도되어 외교관들이 입방아를 찧던 기밀도 아닌 정보를 정작 조선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가쓰라와 태프트가 만난 지 11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과거의 아픈 교훈을 잊고 있는 듯 하다. 아베 신조의 미국 국빈 방문과 상하원 연설이 발표된 다음에서야 우리 정부는 허둥대고, 인도네시아 반둥에서 열린 아시아 아프리카 회의에서 시진핑과 아베가 악수하면서 미소 지을 때 충격을 받았다. 만약 아베와 시진핑의 정상회담이 발표된다면 한국은 누구에게 호소하고 누구에게 항의해야 할 것인가.
외교 무대에서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친구도 없다. 죽마고우란 개인 간에나 있는 것이다. 하물며 돈 문제가 얽히면 친구가 아니라 부모 자식 간에도 원수가 되는 것이 인간사 아닌가.
가쓰라와 태프트의 메모는 1924년 미국 역사가 타일러 데넛에 의해 처음 밝혀졌다. 하지만 이런 발견을 앞에 두고도 조선은 분노할 기력조차 없었다. 이미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지금 미국과 일본, 중국과 러시아가 함께 장단을 맞추고, 다시 어느 틈에 일본과 중국이 슬그머니 서로 손을 내밀고 있다. 혹시 제2의 가쓰라, 태프트 밀약, 아니면 '케리(미 국무장관) 왕이(중국 외교부장)' 밀약이 있는 것은 아닐까.
위정현 중앙대 경영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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