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위화의 '허삼과 매혈기' 스크린으로 옮긴 '허삼관'
[아시아경제 조민서 기자]피를 팔아 가족을 건사한다니. 얼마나 비참하고 눈물겨운 상황인가. 하지만 위화의 소설 '허삼관 매혈기'는 이런 비극적인 상황마저 익살과 해학, 풍자로 유쾌하게 담아낸다. 그가 그려낸 밑바닥 인생은 너무나 궁핍하고 고단한데도, 그 속에서 쉽게 낭만과 낙관을 발견할 수 있으니 크나큰 아이러니다. 낄낄거리며 읽다가 어느 새 가슴 한 켠이 묵직해지는 이 소설이 드디어 영화로 만들어졌다. 제작사가 판권을 사들인지 16년 만이다. 스크린은 이 위화의 문법을 어떻게 영상으로 구현했을까.
하정우 감독, 주연의 '허삼관'의 배경은 1950~60년대 한국이다. 문화혁명이라는 거대한 시대적 흐름을 다뤘던 원작의 배경을 국내 무대로 옮겼다. 영화 전반부의 톤은 발랄하며 재기 넘친다. 초반에 펼쳐지는 일련의 에피소드는 '허삼관'이란 독특한 캐릭터를 이해하는 데 일조한다. 마을에서 제일가는 미녀 '허옥란'과 결혼하겠다고 마음먹은 그는 옥란에게 잔뜩 향수며, 만두와 불고기를 사주고는 다짜고짜 "언제 나한테 시집 올거냐"며 들이대고, 장인어른을 찾아가서는 "데릴사위를 삼아달라"고 간청한다. 어리숙한 듯 뻔뻔하고, 순진한 듯 능청스러운 '허삼관'의 진면모는 옥란과의 결혼이 위기를 맞으면서 더욱 절정을 이룬다.
사랑하는 아내와 일락, 이락, 삼락 세 아들을 둔 허삼관은 소박하지만 남부럽지 않은 생활을 하고 있다. 하지만 장남 일락이가 커갈수록 마을에는 해괴한 소문이 나돌기 시작한다. 일락이의 얼굴이 허삼관이 아니라 옥란이 결혼 전에 잠시 교제했던 하소용을 닮았다는 것이다. 마침내 풍문은 진실로 밝혀지고, 허삼관은 11년 동안 남의 자식을 키웠다는 사실에 분개한다. 이때부터 그의 치사하고도 쪼잔한 복수가 시작된다. 가장 아끼던 일락이를 사사건건 구박하던 허삼관이 심지어 "둘이 있을 때는 아저씨라고 부르라"고 말하는 장면에서는 실소가 터진다.
시종일관 삐딱하고 엇나간 태도로 아들을 대하던 허삼관이 끝내 부성애를 느끼며 가족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후반부가 무리없이 이어지는 것은 연출의 힘이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처음에 고수했던 해학과 풍자의 힘을 끝까지 지켜내지 못한 지점은 아쉽다. 작품은 제목이 '허삼관 매혈기'에서 '허삼관'으로 바뀐 만큼 작품은 철저하게 주연이자 감독인 하정우에 의해 좌우된다. 현재 충무로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배우들이 조연으로 대거 출연하지만, 한 두 장면을 위해 소비돼 아쉬운 측면도 있다. '피'를 둘러싼 다양한 해석을 두고 결국 감독 하정우는 '가족' 코드를 전면에 내세우는데, 그 방식이 지나치게 안전하다는 점이 독인지 약인지 궁금해진다. 14일 개봉.
조민서 기자 summer@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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