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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세시대, 남자가 사는법(35)]모든 끝은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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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최창환 대기자] 땅끝에 왔다.
 해남 땅끝마을. 아내, 군대에 갈 아들과 함께 겨울휴가를 왔다. 육지의 끝이라서 땅끝이다. 전망대에 오르면 땅끝을 노래한 시비가 많다. 한 줄의 시에 가슴이 울린다. 고은 시인의 '땅끝'.


 땅끝에 왔습니다
살아온 날들도
함께 왔습니다.

 저녁 파도소리에
동백꽃 집니다.


 그렇구나. 살아온 날들도 짊어지고 다니는 게 인생이구나. 새삼 느낀다. 짧은 시구에 삶의 여정이 배어 있다. 여기저기 떨어진 붉은 동백꽃도 애처롭다. 삶이 무거운 이유는 지나온 날들을 짊어지고 다니기 때문이다. 얼굴의 주름에, 뭔가를 갈망하는 눈동자, 머리, 가슴에도 지나온 삶이 숨어 있다. 추억, 미련, 상처, 영광, 자랑, 업보로.

 모든 끝은 시작이다.


 땅끝 전망대의 아침은 바다 안개로 덮였다. 뿌연 해무에 햇살이 희미하다. 기대했던 바다 풍광은 보지 못했다. 그래도 아침이다. 새로움이 넘친다. 어둠 속에 잠겨 있던 사물들이 자신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이슬을 머금은 동백꽃, 후박나무, 소나무, 바다, 안개 속의 섬까지. 잠들었던 새들도 깨어나 웃음을 터트린다. 밤의 끝은 아침이고 아침은 시작이다. 바다를 향하면 땅끝인데 바다를 등지면 땅의 시작이다. 여기가 우리 땅의 시작이다. 끝이 곧 출발점이다.


 은퇴도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시 '땅끝'을 '땅시작'으로 뒤집어 봤다. "땅시작에 왔습니다. 살아갈 날들도 함께 왔습니다. 아침 햇살 비추니 동백꽃 핍니다." 은퇴는 영어로 '리타이어(retire)'다. 타이어를 바꿔 끼고 새 출발을 하는 게 은퇴다. 인생이 끝나는 게 아니고 인생 2막의 출발점이다. 새로운 인생의 막이 오른다.


 새 인생을 시작하려면 끝을 시작으로 바꿔야 한다. 말로만 되는 게 아니다. 끝없이 과거에 머물러서는 새 인생을 시작할 수 없다. 내려놓기가 선행돼야 한다. 타이어를 바꿔 끼우려면 낡은 타이어는 내려놔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새 인생이 새 바퀴로 굴러간다. 살아온 날들을 내려놔야 한다. 쉽지 않다. 주름살 속부터 가슴까지 여기저기 숨어 있고 깊숙이 붙어 있다. 찾아내기도 어렵고 떼어내기는 더 어렵다. 무엇을 내려놓고 무엇을 가지고 가야 할지도 모르겠다.


 고은 시인의 다른 시 '그 꽃'에서 답을 구해본다.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못 본
그 꽃


 '비움'과 '내려옴'을 떠올린다.


 산에 오르면 서로 자신이 가져온 음식물을 내놓는다. 배낭을 비운다. 자기 음식을 지키고 남의 음식을 더 챙기는 사람은 없다. 더불어 베푼다. 비워야 가볍고 내려가기도 좋다. 욕심이 차 있으면 내려올 때에도 꽃을 못 볼 수 있다. 욕심, 미련, 집착 따위를 버리라는 얘기로 들린다. 마음이 비워져야 내려올 때 꽃을 본다.


 '내려옴'은 좋은 일이다. 우리나라의 모든 산에는 계곡이 있고 물이 흐른다. 물은 항상 흘러내린다. 낮은 곳을 좋아한다. 노자는 '상선약수(上善若水)'라고 했다.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는 뜻이다. 물이 만물을 적시고 이롭게 할 수 있는 근원은 내려가는 성질 때문이다. 수증기가 돼 한번 하늘에 오른 다음엔 줄창 내려가기만 한다. 내려가기 때문에 모든 것을 적실 수 있다.


 다시 시작하기 위해 내려놓고, 비우고, 내려갈 수 있다면 그나마 행운아다. 삶을 살기보다는 삶에 쫓기는 사람이 태반이기 때문이다. 쫓겨서 아둥바둥 오르거나 쫓겨서 떨어진다. 걸머진 짐의 무게에 눌려 있다. 가족의 생계, 가장으로서의 체면, 책임감 등이 주된 이유다. 쫓기지 않으려면 나를 몰아대는 것들과 결별해야 한다. 쉽겠는가. 가족을 이유로 그렇게 살았다면 불가능할 수도 있다.


 인생 2막을 잘 살려면 그렇다는 얘기다. 내려놓지 않고, 비우지 못하고 삶에 쫓겨도 어쨌든 인생 2막은 새로운 희망이다.


 황새는 날아서
말은 뛰어서
거북이는 걸어서
 달팽이는 기어서
굼벵이는 굴렀는데
 한날한시 새해 첫날에 도착했다


 바위는 앉은 채로 도착해 있었다 <반철환 '새해 첫 기적'>


 사람은 오래 전부터 시간을 나누는 지혜를 활용해 왔다. 시간을 쪼개서 새로 시작할 수 있는 용기와 희망을 만들었다. 시인이 말하듯 새해의 희망은 모두에게 기적처럼 같이 찾아온다. 새로운 삶을 더 준 100세시대의 2막을 기적의 새 출발로 삼으면 될 일이다. 준비하기 어려우면 그냥 리셋하면 된다. 그래도 희망으로 2막을 시작할 수 있다. 한 가지는 잊지 않을 생각이다. 어느 날 다가와 가끔 다시 펼쳐보는 시다.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내 가슴이 말하는 것에 더 자주 귀 기울였으리라(중략)
 진정한 아름다움은 자신의 인생을 사랑하는 데 있음을 기억했으리라(중략)
 분명코 더 감사하고
 더 많이 행복해 했으리라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청소년문제 전문가로 세계적 베스트셀러 '십대를 위한 영혼의 닭고기 수프' 저자인 킴벌리 커버거(Kimberly Kirberger)의 시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이다. 청소년들에게 교훈을 주는 시를 읽으며 스스로 자문해 본다. 알지? 뭐가 중요하고 뭐가 허상인지. 알고 있지? 뭔가 잘못해서 후회한 거보다 안 해본 걸 후회하는 걸. 머리보다 가슴이 중요함을 잊지 않았지?


 "미처 피할 새도 없이 겨울이 가을을 덮친다"<최영미 '북한산에 첫 눈 오던 날'에서>는 말처럼 올 한 해도 인생 1막도 쏜살같이 지나간다. 앞으로는 내 인생을 사랑하고 즐겨서 인생 2막의 끝판까지 행복해야지 다짐해 본다.
 이제 100세시대 연재가 끝난다. 홀가분한 마음과 함께 내년에는 뭐하지 하는 생각과 이런저런 구상이 떠오른다. 삶에 쫓기는 것인지, 내 인생을 즐기는 것인지 알쏭달쏭하다. 모든 끝은 시작이다.




세종=최창환 대기자 choiasia@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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