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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세시대, 남자가 사는법(34)] 반려동물과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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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최창환 대기자]"뉴질랜드에서는 아이, 여자, 애완동물, 남자 순으로 물에서 구한다네요." 동료기자가 함께 차를 타고 가다 해준 얘기다. "허! 동물들은 수영을 잘하는데 왜 그럴까. 사람부터 구하는 게 합리적인데." 서양 사람들이 반려동물에게 전 재산을 상속했다는 뉴스를 심심찮게 본 터라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하긴 우리도 남자 값이 바닥에 떨어졌으니까.


 "누가 창문 열어놨어?" 깜작 놀란 A가 뛰어오면서 소리친다. 반려견이 고층 아파트의 거실 창가에서 목을 내밀고 아래를 보고 있다. 안전창이 열려 있다. 다행히 사고는 없었다. 뭘 모르고 안전창을 열어뒀던 나도, 집들이에 초대한 손님에게 소리친 주인도 잠시 머쓱했다.

 골드미스 A는 반려견을 "우리 애" "우리 딸"로 부른다. 닥스훈트 장모종인 딸을 위한 배려가 집안 곳곳에 배어 있다. A는 병약한 딸을 수발하는 엄마 이상으로 녀석을 보살핀다. 다리가 짧은 녀석이 스스로 엄마 침대에 오를 수 있도록 침대 옆에 계단을 만들어줬다. 딸내미 나이는 14살이다. 사람 나이로 치면 100세에 육박한다. 햇빛을 즐기며 바깥구경을 하라고 창가에 별도의 침실도 준비했다. 나가고 싶어 쇠문을 긁다가 발톱이 다칠까봐 문과 거실 사이에 격리문도 만들었다.


 B는 비혼 여성이다. 결혼을 아직 안 한 미혼이 아니다. 결혼을 하지 않는 삶을 선택했다. 씨를 구해 아이는 가질 생각이다. 의료생협 활동을 하는 B는 의료보험의 가족제도를 바꿔야 한다고 생각한다. 반려동물도 가족에 포함시켜 보험적용을 해야 한단다. 제도가 바뀌기 전이라도 의료생협 활동을 반려동물까지 확대할 계획이다. 회의적인 시선에는 시간이 문제지 그렇게 가야 하고, 결국 간다고 자신한다.

 그녀들의 애들은 그녀들의 침대에서 함께 자는 사랑스러운 가족이다. 걔들은 그런데 남자들은 어떤가? 반려동물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것은 좋다. 그런데 반려동물과 비교당하는 중년남자들의 꼴은 말이 아니다. 흔히 하는 농담으로 중년남성들은 이사를 갈 때 강아지를 꼭 껴안고 있어야 한다고 한다. 놓고 가려해도 강아지 때문에 할 수 없이 함께 데려간다는 얘기다.


 농담만이 아니다. 많은 경우 현실이다. 양희은과 강석우가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 '여성시대'. 목요일에는 '남성시대' 코너가 있다. 남성 위주의 사회에서 여성의 목소리를 담아내던 여성시대에 이제는 남성시대가 들어갔다. 남자들 힘이 빠졌다는 증거다. 거기서 나온 얘기다. 요즘 부인들은 남편에게 "우리 애(반려동물) 밥 잘 챙겨 먹이고 산책 잘 시켜"라고 당부하며 여행을 떠난다. 젊었을 때는 미안해 하면서 국과 밑반찬을 미리 준비하던 그녀들인데.


 그러다가 남자가 애완동물을 좋아하는 이유와 애완동물과 비슷한 면을 얘기한다. 남자는 규칙을 좋아한다. 매일 같은 시간에 먹이를 주고 산책을 하는 게 체질에 맞는다. 남자는 영역표시를 하고 충성을 좋아한다. 애완동물은 남자에게 충성을 다하는 존재다. 열심히 하면 애완동물처럼 사랑을 받아 순위가 올라간다는 얘긴지 뭔지. 불만스러운 생각도 떠오른다. 나도 남자니까.


 순위가 뒤로 밀린 건 분명하다. 가장(家長)의 의미가 달라졌다. 가족을 통솔하고 대표하는 사람에서 집안에서 '가장' 순위가 밀리는 사람으로 추락했다. 다는 아니지만 보편적으로 그렇다. 반찬도 아이들 우선이고 반려동물을 먼저 챙긴다. 아무리 힘이 빠졌어도 '남편'이고 '아버지'인데. 존중받지 못하고 희화화되는 풍토다.


 맑은 눈망울로 다가와 꼬리를 흔들며 내 무릎에 얼굴을 기댄다. 지금은 저세상으로 간 시추 순돌이가 그랬다. 그럴 때는 피곤이 풀리고 걱정이 사라진다. 큰 위안이 됐다. 사람으로 가득한 이 세상에서 얘기 나눌 사람조차 없을 때가 있다.(제프 스완 '민들레 목걸이'에서) 그럴 때 반려동물은 따듯한 반려자다. 말은 없지만 다 안다는 듯이 바라보며 따뜻한 체온을 나눠주는 순돌이가 고마웠다.


 반려동물은 위안과 행복을 준다. 배신하지 않는다. 상처주지 않는다. 옆에 있어 주고 믿을 수 있기만 해도 큰 힘이 된다. 그래서 반려동물 같은 친구가 있었으면, 나도 이런 친구가 됐으면 한다. 힘들다. 곰이나 호랑이가 아니라 사람에게서 상처받는다. 내가 상처를 주기도 한다. 멧돼지, 벌에게 상처받으면 온 세상이 난리다. 드문 일이다. 대부분의 아픈 상처는 사람 때문에 생긴다. 서로 엮여 살고 기대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가족 속에서도 마찬가지다.


 남자도 지친다. 자존심에 상처받는 게 숫컷에게는 가장 큰 상처다. 생각해 본다. 권한이 없는 곳에 책임도 의무도 없다. 책임지지 않으려는 초식남이 늘어나고 의무만 걸머진 중년남성들이 황혼이혼을 선택하는 이유다. 물론 여자들도 힘들다. 슈퍼우먼 신드롬이 있다. 가사와 육아, 직업을 병행해야 하는 여성들의 어려움도 말로 표현하기 힘들다.


 남자와 여자가 함께 힘들다. 드러나는 현상은 다르지만 이유는 똑같다. 세상이 달라지고 남자와 여자에 바라는 역할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과도기다. 전통적인 역할에 새로운 역할을 추가로 요구한다. 기사도 정신은 기사일 때 가능하다. 중세기사들은 십자군 원정 때 정조대를 채우고 전쟁터에 갔다. 그러자는 얘기가 아니라 그랬다는 얘기다. 새로운 역할 모델과 역할 분담이 필요하단 말이다.


기사 흉내라도 내려면 존중받아야 한다. 깔보이면서 기사도 정신을 강요받으면 "어, 이게 아닌데"라고 의문을 품게 된다. 아빠들은 아빠라는 이유로, 남편이란 이유만으로도 무시당하지 않을 충분한 자격이 있다. 정말 부탁이다. 더 이상 개와 줄 세우지 말아 달라. 농담으로 말하다 진실이 된다.  




세종=최창환 대기자 choiasia@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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