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 피해 할머니 증언⑤
[아시아경제 김동선 기자, 주상돈 기자, 김민영 기자, 김보경 기자] #41. 이옥선 "죄책감에 19살부터 전국을 떠돌아"
이옥선(84) 할머니는 16세인 1943년 고향인 대구에서 중국으로 끌려가 2년여 동안 위안부 생활을 했다. 해방 직전 중국 현지인의 도움을 받아 피신을 했다가 유엔(UN)군의 도움을 받아 신의주를 거쳐 고향으로 돌아왔다. 같이 끌려간 동네 친구의 생사를 알 수 없었던 이 할머니는 혼자만 살아 돌아왔다는 죄책감에 19세부터 전국을 떠돌았다. 2011년에는 전 재산이나 다름없는 2000만원을 2년 전 보은군민장학회에 기부한 것이 알려져 국민포장을 받았다.
지난해 7월부터 3달간 미국과 독일 등을 거치는 '증언 대장정'에 참여하는 등 12년째 해외 증언 활동을 하고 있다. 퇴행성 관절염과 골다공증이 심해져 최근에는 성인용 보행기와 휠체어에 의지하고 있다. 충북 보은에서 생활하던 이 할머니는 최근 경기 광주 나눔의집에 입소했다.
#42. 이용수 "위안소 끌고간 일본인에게 전기고문 당해"
대구 이용수(86) 할머니는 1928년 6남매의 고명딸로 태어났다. 부잣집 유모 생활을 하는 어머니 대신 남동생 4명을 키웠다. 16세에 원피스와 빨간 가죽구두를 보여주며 '배불리 먹여주고 집도 잘 살게 해주겠다'는 일본 남자의 말에 속아 친구와 함께 따라 나섰다. 중국을 거쳐 대만 위안소로 강제 동원됐다. 위안소의 주인은 이 할머니를 대구에서 데려간 일본인이었다. 이 주인에게 전기고문도 당했다.
할머니는 해방 후 고향에 돌아왔다. 면사포 한번 못 써본 것이 씁쓸하다는 생각에 환갑이 되던 1989년 75세의 할아버지와 결혼을 했다. 하지만 의처증이 심해 이혼했다.명랑한 이 할머니는 사람들과 잘 어울린다. 또 서울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리는 수요집회 참석을 위해 서울을 자주 찾을 만큼 활동적이다.
#43. 이효순 '또래 3명과 열일곱에 빨래터서 끌려가'
이효순(89) 할머니는 17살 때 경남 의령의 한 빨래터에서 끌려갔다. 트럭에 올라타고 보니 또래 3명이 이미 붙잡혀 있었다. 위안소에서 4년을 보내고 해방이 된 후 고향으로 돌아왔다. 결혼 후 경남 합천에서 살다가 남편이 세상을 뜬 뒤부터 혼자 지냈다.
현재 이 할머니는 여동생의 보호를 받으며 창원의 한 노인전문병원에 입원 중이다. 코에 산소공급기를 끼고 생활하는 할머니는 간간이 수혈까지 받아야 할 정도로 몸이 쇠약해진 상태다. 지난달 14일 만난 이 할머니는 일본 정부가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사죄ㆍ배상하지 않는 점에 대해 "즈그들 뺏기기 싫으니까 그렇지"라고 답했다. 할머니의 오빠도 일본군에 강제징용됐다가 희생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44. 임정순 "일본인이 와서 해코지"…현실과 TV 혼동
경기도 성남에 사는 임정순(85) 할머니는 간병인이 돌봐주고 있지만, 지금껏 혼자 생활한 세월이 길어서인지 가끔 TV와 현실을 혼동하는 증상을 보인다. 어느 날 할머니는 정대협 활동가들에게 "일본 사람들 여럿이 찾아와 나를 빙 둘러싸고 앉아서 '빠가야로(바보의 일본말), 네가 돈 벌고 싶어 온 거지. 우리는 강제로 데려간 적 없다'고 해서 한참을 울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오래 전부터 파킨슨병과 당뇨를 앓고 있는 할머니는 다리 상태도 좋지 않아 외출을 거의 못한다. 친딸이 있지만 할머니는 혼자 지내는 편이 낫다며 같이 살길 마다하고 있다. 그렇지만 밝은 성격에 웃음도 많은 할머니는 평소 사람들과 둘러 앉아 간식을 먹으면서 재미있게 이야기 나누는 걸 좋아한다.
#45. 정복수 '진짜 나이 알려주면 버럭, 최고령 소녀'
1916년생인 정복수(98) 할머니는 위안부 피해 생존자 가운데서 가장 나이가 많다. 경기 광주 '나눔의집'에 살고 있는 할머니들 가운데 가장 체구가 작은 그는 일명 '까칠 할머니'로 통한다. 초기 치매 증상이 있는 정 할머니는 온화한 미소를 짓다가도 기분에 따라 눈빛과 말투가 변한다. 할머니의 나이는 90살에서 멈춘 듯하다. 주변에서 할머니의 진짜 나이를 알려주면 버럭 화를 낸다.
카메라를 들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예민한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기자와 만난 지난 9일 정 할머니는 "사진 찍을 거면 가!"라며 지팡이를 들고 호통을 쳤다. 하지만 평소에는 나눔의집 활동가들을 살뜰히 챙기고, 학생들이 찾아오면 손주처럼 따뜻하게 대해준다고 한다.
#46. 최갑순 '14살때부터 해방될 때까지 12년간 고초'
최갑순 할머니는 1919년 전라남도 구례에서 태어나 14살 때 중국 둥안성(東安省)에 있는 위안소로 끌려가 해방이 될 때까지 12여년간 고초를 겪었다. 이후 고향으로 돌아오기 위해 장사를 시작했다. 최 할머니는 구례에서 농사를 짓고 양아들을 키우며 생계를 이어갔다. 마흔이 넘어 결혼을 한 후 뒤늦게 서울에 살림을 차렸다. 20여년 전 남편은 먼저 세상을 떴다.
할머니는 서울의 한 노인전문병원에 입원한 지 3년이 넘었다. 2012년 초 양아들마저 운명을 달리했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치매를 앓고 있는 할머니는 아들에 대한 기억을 모두 잊었다. 이제는 눈과 귀도 나빠지고, 말할 기운마저 성치 않은 상태다. 시민단체 활동가들은 이전보다 살이 너무 빠진 할머니의 모습을 보고 안쓰러워하고 있다.
#47. 최○○ '아이 낳지 못해 입양한 양딸에 의지해 살아'
1925년생인 최○○ 할머니는 위안부 피해를 겪은 후 아이를 낳지 못해 양딸을 입양해 키웠다. 2003년에 위안부 피해자로 등록한 최 할머니는 "남부끄러워 죽을 때까지 얘기하지 않으려 했는데…"라며 정대협에 증언을 했다고 한다.
최 할머니는 수원의 임대아파트에서 혼자 살다가 10년 전부터 건강이 급격히 나빠지기 시작했다. 지금은 경기 용인의 한 병원에서 일반병실과 중환자실을 오가며 자신과의 사투를 벌이고 있다. 노래를 잘해 동요 '나비야'를 즐겨 불렀던 할머니는 이제 목에 가래가 껴 전처럼 예쁜 목소리는 나오지 않는다. 치매 탓에 마음에 드는 사람이 면회를 오면 연신 "예쁘다, 예쁘다"고 말하는 최 할머니다. 다행히 딸이 곁에서 할머니를 지극정성으로 보살피고 있다.
#48. 최○○ '일본 정부의 태도에 그저 먼 곳만 바라봐'
1922년생인 최○○ 할머니는 서울의 한 요양병원에서 지낸다. 할머니는 가장 좋아하는 음식으로 소고기를 꼽는다. 하지만 이가 많이 빠져 잘 씹지를 못해 소화기능이 약해지고 말았다. 이런 할머니를 위해 시민단체 활동가들이 틀니를 하자고 권유해도 "얼마 안 있으면 죽을 텐데 뭘 하느냐"고 사양한다고. 위안부 운동 상황과 일본 정부의 태도에 대해 설명하니 그저 짧게 대답하면서 먼 곳만 바라봤다고 한다.
할머니는 무릎도 좋지 않고 손을 많이 떤다. 가족이 있지만 자주 찾아오기 힘들어 할머니는 요양병원 생활이 늘 외로운 듯하다. 활동가들과 작별인사를 하면 계속해서 뒤를 돌아보며 아쉬운 마음을 감추지 못한다고. 활동가들은 한목소리로 "할머니는 손도 곱고, 피부도 하얘 웃는 모습이 소녀처럼 참 보기 좋다"고 말한다.
#49. 최○○ "맥주공장 취직시켜 준다는 말에 속아 끌려가"
1926년 경남 양산에서 태어난 최○○ 할머니는 대만의 맥주공장에 취직시켜준다는 말에 속아 위안부가 됐다. 현재 할머니는 5만원짜리 지폐를 보면 "내 때는 돈에 여자 그림(신사임당 초상)이 없었다"면서 쓰레기통에 돈을 버릴 만큼 치매가 심하다. 할머니의 남편은 큰아들이 21세 되던 해 세상을 떴다. 남편과 사별한 후 할머니는 방 두 칸에 부엌 딸린 집에서 두 아들과 함께 산다. 할머니는 당뇨를 앓고 있어 인슐린 주사를 주기적으로 맞고 관절약, 진통제, 영양제 등을 수시로 복용하고 있다. 눈도 침침해 얼마 전 혼자 발톱을 깎다가 생살을 도려내기도 했다.
할머니는 적적할 때 집앞 평상에 나가 앉는다. "늙고 병들면 못 논다카더니 이 모양 이 꼬라지 되고 보니 인자는 데리러 오는 사람도 내한테 놀러오는 사람도 없다." 가족 때문에 감히 세상에 선뜻 나서지 못하지만 또 세상 밖으로 나가고 싶어하는 할머니다. "건강하게 잘 지내라잉. 그리고는 꼭 다시 와서 통도사에 데려가." 7월27일 기자와 헤어지면서 할머니는 나직이 말했다.
#50. 하상숙 "아이 못 갖게 하는 주사 수시로 맞아"
1928년 충남 서산 출생인 하상숙(87) 할머니가 중국 취업 사기에 속은 건 16살 때였다. 할머니는 중국 적경리(積慶里)에서 기미코라는 이름으로 위안부 생활을 했다. 쇠창살로 둘러싸인 위안소에서 할머니는 하루에 많게는 15명의 일본군인들을 상대했다. 군의관이 설명한 '아이를 못 갖게 하는 주사'도 수시로 맞았다. 해방 후 위안소가 있던 곳에 버려져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현재 중국 우한(武漢)에 정착해 살고 있다.
중국 실태조사 때 할머니를 만난 정신대연구소 관계자에 따르면 하 할머니는 1950년대 말 우한 지역의 조선인들 모임을 이끌었고 위안부 피해자 명단을을 비롯해 여러 문서를 작성해 보관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때 만난 중국의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소원은 두 가지였다고. 첫째는 조국 방문, 둘째는 우리 노래의 카세트를 갖고 싶다는 것. "죽을 때는 고향에서 죽어야 하는데." 고향을 그리워하는 할머니는 지난해 8월14일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수요집회에 참석하기도 했다.
▶'위안부 보고서 55' 온라인 스토리뷰 보러가기: http://story.asiae.co.kr/comfortwomen/
김동선 기자 matthew@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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