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인데 왜 사람들은 투표를 하지 않는가? 무능하거나 부패한 집권 세력을 합법적으로 몰아낼 수 있는 수단인데 말이다. 그런데 이 문제를 거꾸로 뒤집어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도대체 선거날에 왜 투표를 하러 가는가? 모처럼 집에서 쉴 수도 있고 놀러갈 수도 있는데 말이다. 선거일이 공휴일이 아니라면 더더욱 의아한 일이다.
정치학의 합리적 선택 이론에 따르면 투표의 역설은 왜 사람들이 시민의 권리이자 의무인 투표권을 행사하지 않는가가 아니라 왜 사람들이 고생스럽게 투표하러 나서는가이다. 먼저 투표를 해서 얻는 이익을 생각해보자.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이나 후보가 집권하여 자신이 지향하는 이념이 구체화되거나 자신에게 유리한 정책이 펼쳐지는 등의 여러 이익을 B라고 하고, 대신 실제로 투표장에 가는 등의 투표 행위에 드는 비용을 C라고 하자. 투표를 한다고 결정하면 C는 반드시 일어나는 사건이지만 B는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가 당선이 되어야만 실현된다.
즉 B의 실현은 자신이 표를 던짐으로써 지지 후보가 당선할 확률에 달려있다. 이를 p라고 하면 투표할지 말지는 p*B - C라는 간단한 셈으로 표현된다. 문제는 p, 즉 자신의 한 표가 선거에서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확률이 너무 작기 때문에 투표의 혜택이 아무리 커도 이 셈의 결과는 거의 항상 음수라는 것이다.
역설적인 현상은 이렇게 손해보는 선택인데도 사람들이 투표하러 간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이렇게 손해 나는 선택을 하는 무수한 사람들에 기대어 민주주의가 지탱되고 있는 셈이다. 투표의 역설은 하나의 이론적 가설에 불과하고 정치적 무관심을 조장한다고 비판받기도 하지만, 민주주의가 가능한 이유를 득을 볼 가능성이 별로 없음에도 수고스럽게 투표하러 나서는 사람들에서 찾음으로써 이들이 왜 '그럼에도 불구하고' 투표를 하는지 주목하게 만들었다.
일상의 소소한 선택에서도 '~때문에'가 아니라 '~임에도 불구하고'라는 선택이 궁극적으로는 더 나은 선택으로 이어지는 것을 보게 된다. 학생들을 상담하다 보면 많은 고민들이 결국 양자택일 문제로 귀결되는데, 공부를 계속하려면 졸업 후 국내 대학원을 진학할지 외국에 유학갈지, 이공계 전공을 살려 다른 분야로 나갈 때 경영이 나은지 정책 쪽이 나은지, 학위를 마치고 결혼ㆍ출산을 할지 학위 과정 중에 하는 게 나은지 리스트가 끝이 없다.
부모로서도 아이들을 학원에 보낼지 말지, 공부 더 열심히 하라고 잔소리를 할지 그냥 믿고 내버려둘지 등 끝없는 선택에 놓인다. 돌이켜 보면 학생 상담이나 자식 훈육에서 A와 B라는 선택을 비교할 때 어느 게 더 나은지 셈을 굴린 경우에는 늘 답이 없었다. 그런 선택은 투표의 역설처럼 그 혜택의 실현이 자신의 선택이 성공할 가능성 여부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똑같은 비교를 하면서 어느 게 더 힘든지 비교하면(답이 여전히 없음에도 불구하고) 선택이 명료해진다. 선택에 따른 비용은 성공 여부에 상관없이 스스로 감내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두 가지 갈래 길에서 어느 길이 더 좋은지 편한지 계산하고 걸어가다 보면 후회할 가능성이 높다. 가다 보면 분명 힘이 드니 안 가본 길이 더 나아보일 수밖에 없다. 반대로 고생길이 훤한데도 그 길의 가치와 의미를 두고 선택한다면 후회할 가능성이 적다. 가다가 힘들어도 이미 출발할 때 힘들다는 걸 예상하고 있었으니. 요즘 남편은 아이들에게 미래 배우자감으로 '그래서'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혼할 사람을 데리고 오라고 한다. 가정 형편이 안 좋지만, 미남은 아니지만, 변변한 직장은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이 살고픈 사람을 찾으면 오래 같이 잘 살 수 있을 거라며.
김소영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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