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이규성 기자]고 김근태는 세상을 떠난 지 2년만인 지난 5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한 무죄 판결을 받았다. 민주화운동청년연합을 결성, 민주화에 앞장섰던 김근태는 1985년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 끌려가 모진 고문과 거짓 자백을 강요받았다. 물고문, 전기고문 등은 물론 심리적 고문을 받고 22일동안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짐승같은 시간을 보냈다.
당시 재판부는 조작된 자백을 근거로 징역 5년형을 선고했다. 이후 김근태는 2012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했다. 그런 김근태의 시간이 '짐승의 시간'(도서출판 보리 출간)이라는 만화로 되살아났다. 지난해 아시아경제신문 연재소설 '짐승들의 사생활'에서 삽화를 담당하기도 했던 박건웅 화백의 역작이다. 이 작품은 550쪽으로 인간 김근태의 면모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러면서도 고문기술자들이 우리가 길거리에서 마주칠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면서 누군가에게는 따뜻한 아버지일 수 있다는, 참단한 현실도 가감없이 보여준다. 특히 판화기법의 표현은 우리를 1980년대 어둡고 암담했던 시절로 되돌아게 한다.
박 화백은 "평범한 사람들이 제도나 틀 안에 갇혀 행동할 때 어디까지 악해질 수 있는 지를 보여주고 싶었다"며 "이들이 직업적으로 고문을 가하며 갖는 마음상태까지 표현하려고 애썼다"고 말했다.
김근태는 출옥 이후에도 정부기관이 가하는 고문, 즉 국가 폭력이 일어나지 않도록 온 힘을 바쳤다. 지금도 민간인 사찰과 간첩 조작이 일어나는 상황에서 '고문'이 사라진데는 김근태의 노력이 크다. 그는 오랫동안 고문 트라우마에 시달렸다. 해마다 9월이면 몸살을 앓았고 치아 치료를 받으러 병원에 갔다가 고문 기억 때문에 되돌아온 적도 많았다. 생을 마감하기 전, 고문 후유증을 얻은 파킨슨병에 시달렸다.
박 화백은 "김근태는 우리 민주주의의 상징이자 실천자이며 우리가 지금 일상을 누릴 수 있는 것은 김근태같은 이들의 헌신과 노력 덕분"이라며 "현실을 외면해 버리는 우리의 무관심과 싸워야한다는 김근태의 말을 잊지 않게 위해 만화를 그렸다"고 강조했다.
이 책은 지난해 한국만화영상진흥원에서 기획한 해외진출 기획원고 지원사업에 선정돼 유럽 출판시장에도 이미 선보였다. 당시 부아뜨, 아 뷜, 데 흥 덩 로, 아그륌 등 유럽 출판사 7곳에서 관심을 보였다. 해외지원사업 선정작품 중 러브콜이 가장 많았던 작품이기도 하다. 유럽 출판사들은 작품을 살펴보고는 "(박건웅 화백이) 만화로 표현해낸 그림과 연출이 매우 뛰어나다"고 극찬한 바 있다. 고문이라는 보편적인 주제와 박 화백의 작품성이 인정받은 셈이다.
박 화백은 노근리 학살, 제주 4.3항쟁, 비전향 장기수 등 다소 묵직한 주제를 밀도 있게 다뤄온 작가다. 각 작품마다 여러가지 기법을 활용해 어려운 주제와 역사의식을 표현하기로 정평이 나 있다. 2003년 대한민국만화대상 신인상, 2010년 오늘의 우리만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박 화백은 "이 만화를 보며 독자들은 우리가 공기처럼 느끼고 있는 민주주의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질까 궁금하다"며 "인간 김근태, 민주주의 김근태가 우리에게서 잊혀지지 않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어 "우리는 지금 짐승의 시간을 살고 있는지 다시금 돌아볼 때"라고 덧붙였다.
한편 함세웅 신부는 "민주주의자 김근태는 자신의 몸을 바쳐 우리에게 김근태 정신을 남겼다"며 "김근태 정신은 우리 사회 공동체의 인간성을 회복하고 평등을 이룩하는 일"이라고 설명했다.
이규성 기자 peac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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