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임의 물리학
[아시아경제 정종오 기자]#회사원 A씨. 오늘 단단히 상사로부터 질책을 받았다. 동료들이 보는 앞에서 상사는 거침없는 말을 쏟아냈다. 변명할 시간도, 반박할 여유도 주어지지 않았다. 묵묵히 그 상황을 견뎌내는 수밖에 없었다. 5분 동안 그렇게 당했다. 점심시간을 얼마두지 않고 일어난 일이었다.
A씨는 상사로부터 마침내 풀려났고 가방을 챙겨들고 길거리로 나섰다. 가까운 공원으로 나갔다. 벤치에 앉아 가방에 넣어 두었던 아이폰과 이어폰을 꺼냈다. 아침에 분명 잘 챙겨놓았던 이어폰이 꼬일 대로 꼬여 있었다. 하나하나 풀기에는 A씨의 마음이 여유롭지 않았다. 그는 "인생도 꼬이고 이어폰마저 꼬여 버렸네"라며 긴 한숨만 내쉬었다. 다행인 것은 그때 살랑살랑 바람이 불어주었고 짙은 녹음과 그늘이 그나마 그를 위로해 주었다는 것이다.
분명 잘 정돈해 가방에 넣어두었는데 필요할 때 꺼내려다 보면 이어폰은 꼬여있기 일쑤이다. 이어폰은 왜 이렇게 항상 꼬여있는 것일까. 심지어 이어폰 꼬임 방지 액세서리까지 나온 현실이다.
A씨처럼 음악을 듣거나 전화를 걸기 위해 이어폰을 꺼내려다 마치 자신을 향해 도전이나 하듯이 꼬일 대로 꼬여있는 이어폰과 마주치는 일은 일상이 돼 버렸다. 과연 그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꼬임의 기본 물리학'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이런 이어폰을 두고 심술궂기도 하고 발칙한 생각이 한꺼번에 드는데 하나하나씩 풀어내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다.
이런 현상은 애플의 '이어버드(earbuds)'뿐만 아니라 대부분 이어폰에서 겪을 수 있는 일이다. 유독 이어버드가 두드러지는데 이는 애플의 상징적 브랜드인 '하얀색'과 무관하지 않다. 하얀색이다 보니 눈에 더 잘 띈다.
이 '꼬임의 물리학'을 두고 직접 실험을 진행한 교수들이 있다. 미국 샌디에이고 캘리포니아대학의 도리안 레이머(Dorian M. Raymer) 연구팀은 왜 이어폰들이 이용자들을 대상으로 '반란과 발칙한 행동'을 하는지 조사했다.
결론적으로 줄의 길이와 줄의 운동량에 있었다. 연구팀은 46㎝ 이하의 이어폰의 경우 줄이 꼬이는 현상은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반면 46~150㎝ 사이의 이어폰들을 박스에 담아 회전시켰을 때 꼬임 현상은 어김없이 나타났다. 150㎝ 이상의 경우에는 꼬임 현상이 일어날 확률은 50%에 이르렀다. 연구팀은 총 3415번이나 회전하는 박스 속에 이어폰을 넣은 뒤 꼬임 현상을 연구한 결과를 공개했다.
연구결과 줄이 긴 이어폰의 경우 아무리 잘 정돈해 가방에 넣더라도 줄의 길이와 가방의 흔들림으로 이후 꼬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특히 Y형태로 돼 있는 이어폰의 경우는 그 경우의 수가 더 높았다.
이것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이어폰이 줄의 길이와 운동량에 따라 자기 스스로 꼬이기 때문에 잘 정돈해 넣어다 하더라도 꼬임 현상은 피할 수 없는 셈이다. 도리안 레이머 교수는 "이어폰 줄의 길이와 가방의 흔들림 등 운동량에 따라 일어나는 물리학의 문제이지 정돈을 잘 하지 않는 이용자들의 잘못이 아니다"라고 이용자들을 위로했다.
연구팀은 이어폰을 만드는 업체들이 '꼬임의 물리학'을 이해하고 앞으로 새 제품이 이런 개념을 참고한다면 꼬임을 방지하는 이어폰의 탄생도 가능하지 않겠느냐는 충고도 잊지 않았다.
정종오 기자 ikokid@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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