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저것 열거하다가 잘 생각나지 않으면 이 말을 곧잘 써먹었던 기억이 난다. 기타 등등(等等). 기타는 '그 외 다른 것'이라는 의미이고 등등은 '무엇무엇들'이란 뜻이니 구체적으로 제시한 것들 말고 바깥의 것들이 기타 등등이다. 기타만 해도 될 터인데 등등을 붙인 것은 거명하거나 나열하지 못한 것이 적지 않으니 양해하라는 의미가 숨어있다.
이 말은 학술적인 용어로도 쓰인다. 유목(類目)이라는 게 있는데 그 유목에 끼지 못한 것이 바로 '기타'이다. 유목은 무엇인가를 나누는 이름이다. 신문사의 부서들을 보면 정치부가 있고 사회부가 있고 문화부가 있고 경제부가 있고 체육부가 있고 생활과학부란 것도 있고 국제부란 것도 있다. 신문사의 부서를 열거해야 할 때 정치부, 사회부, 경제부, 문화부, 기타 부서라고 하면, 앞의 네 부서 이외엔 모두 기타에 숨는다. 열거해야할 필요성을 충족시키는 부서들이 거론되었다고 생각하면 굳이 나머지까지 다 들 것 없이 기타에 넣어버리는 '표현의 편의주의'이다. 그런데 이런 문제도 있다. 문화부와 대중문화부가 나뉘어져 있다고 할 때 그들 두 부서의 관계와 문화부와 정치부의 관계가 같다고 말할 수 있을까. 어떤 것이 문화부의 취재 대상이며 어떤 것이 대중문화부의 취재 대상인지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을까. 국제부와 정치부도 곰곰히 생각하면 대등하게 양립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그렇다면 국제정치는 어디에 소속되어야 하는가. 신문사에서 나눈 부서들은 그저 업무상의 편의와 오랜 관행에 의해 만들어진 엉터리 '유목'이다. 어쨌거나 그 유목 가운데서도 신문사가 하는 일을 대표할 만한 부서가 있고, 기타 속에 숨겨둬도 별 문제 없는 부서가 있다. 예를 들면 내가 근무하던 주말팀이나 원래 내 소속인 편집부도 자주 '기타 부서'에 묶여든다.
설문조사에는 꼭 기타라는 항목이 있다. 촛불시위를 찬성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찬성이 있고 반대가 있다면 기타도 존재한다. 찬성하지도 않고 반대하지도 않는 사람도 있고, 그 질문에 대해 무응답으로 일관하는 사람도 있고, 그 질문에 대해 엉뚱한 의견을 제시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대답 중에 찬성이 5%, 반대가 4%인데 기타가 91%라면 질문이 뭔가 잘못되었거나 질문의 문항이 잘못 짜여져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항목을 만들 때 대부분은 다 분류에 속하고, 극히 일부만 기타로 남아야 문제를 제대로 짚은 설문인 셈이다. 기타는 그러니까 분류의 한 항목으로 만들지 못한 나머지를 묶어서 한꺼번에 말하는 방식이다. 어떤 학자는 우리가 찬반의 흑백구도에 너무나 익숙해져서 저 기타의 의견들을 매도하거나 무시하는 풍조가 있다고 지적한다. 회색인간이나 어중간한 태도를 비난하는 건 우리 사회에선 낯설지 않다.
기타는 서럽다. 적어도 세 가지 이유에서 서럽다. 첫째는 중요도에서 밀렸다는 점이요, 둘째는 남들이 호명될 때 익명의 그늘 속에 묻혀버린다는 점이요, 세째는 대체로 마이너리티라서 말빨도 안서고 권익을 주장하기도 어렵다는 점이다. '기타(其他) 인생'이 서러운 이유도 그렇다. 스스로를 기타에 분류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어느 누구도 타인의 삶을 살 수 없으며 오직 자기의 삶 만을 살아갈 수 있다. 그러니 자기를 포함하는 열거라면 주요 항목엔 자기가 포함되는 것이 바로 주관이다. 그러니 어느 누구도 스스로에겐 기타 인생일 수 없다. 문제는 각자의 주관 말고, 어떤 사회적 잣대가 어떤 존재를 '기타 인간'으로 몰아넣는다. 이런 사람, 저런 사람, 그리고 기타 등등. 기타에 속한 사람은 그 열거의 취지에서 볼 때 전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지 못하며, 이름도 필요 없으며, 분류에서 제외된 소수이다.
고등학교 때 소풍을 간 기억이 떠오른다. 무리 짓기(grouping) 놀이는 나를 당혹스럽게 하고 난처하게 만들었다. 선생님은 호루라기를 불며 손가락 네 개를 펴서 '4명'이라고 소리친다. 그러면 원을 그리며 돌던 아이들은 재빨리 이웃 아이들을 붙잡아 4명의 단위를 만들어야 한다. 나는 동작이 늦어서인지 가끔 얄궂게도 혼자만 남았다. 무리를 만든 아이들은 홀로 남은 나를 보며 측은해하기도 하고 비웃기도 한다. 나와 같은 친구들이 꼭 서너 명씩 나온다. 어떤 때는 그 나머지끼리 모여도 한 팀을 만들 수 있는데도 이리저리 흩어져 방황하고 있기도 한다. 그 절박한 소외의 악몽이야 말로, 기타 인간의 비애를 말해준다.
미셀 푸코가 끈질기게 추적한 것은 그 기타 인간들이 결코 비정상적인 게 아니며 다만 사회적 권력관계의 결과일 뿐이라는 점이었다. 미친 놈이 진짜 미친 놈이 아니라, 다수의 이쪽에서 소수의 저쪽을 향해 미쳤다고 규정한 결과라는 점을 증명하려 애썼다. 기타 등등에는 뜻 밖에 세상의 중요한 진실이 들어 있다. 기타를 분류하는 행위야 말로 세상의 '정치'이며 권력의 작동이다. 내가 기타에 속한 것은 나의 자질이나 존재 가치가 기타이기 때문이 아니라 분류하는 쪽의 편의주의와 주관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그래서 중요하다. 내가 기타라는 이름의 익명인 것은 이름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내 명찰을 떼고 누군가가 기타 속에 몰아넣었기 때문이다. 이름 모를 풀이니, 잡초이니 하는 것이 진짜 이름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정원사가 그 풀의 이름을 모르거나 부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잡초는 호명된 풀들 바깥에 있는 기타 풀이다.
기타는 인간이 합리라는 이름으로 문제를 구획해온 일이 남긴 후유증이다. 남자와 여자라는 분류는 그 중간을 배제해버린다. 남자 아니면 여자이어야 한다. 그 중간에서 서성거리는 성적정체성을 지닌 이는 기타 인간이다. 이 소수의 개인에 대한 사회의 태도는 아주 사납고 냉혹하다. 그것이 처음에는 단지 '편의'에 의한 분류일 뿐이었는데 분류가 뿌리내리면 그것이 존재를 억압한다. 남자이거나 여자가 아니면 살기 어렵다. 기타는, 인간의 분류가 아무리 정밀하더라도 새나가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점을 인정한 개념적 장치이다. 그러나 그것에게 정당한 권리를 부여한 '인정'이 아니라, 그저 뭉뚱그려 뒤쪽에다 슬쩍 숨겨놓는 그런 장치이다. 기타를 섬세하게 바라보는 시선, 기타로 분류된 개체들에 대해 인간적인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진 사회. 그것이 나는 다양성이 진정으로 살아있는 '현대적인' 사회라고 생각한다. 기타에 대해 부려온 우리의 히스테리와 불감증들이 우리 사회를 옥죄는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탄핵 찬성. 탄핵 반대. 그리고 기타? 어떤 놈들이지? 그들도 분류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귀한 사람이다. 그걸 제대로 인정할 수 있어야 평등한 세상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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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편집에디터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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