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유수경 기자]만질 수 없지만 아찔하고, 볼 수 없지만 그리운 '그녀'가 있다. 영화 '그녀(HER)'의 주인공 사만다는 육체가 없다. 인공지능 운영체제일 뿐이다. 하지만 듣고 말하고 진화하며 심지어 사랑도 한다.
지난해 제8회 로마국제영화제에서는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그녀'에서 목소리 연기를 펼친 스칼렛 요한슨이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것. 극중 그의 아름다운 얼굴은 단 한 장면도 나오지 않는다.
인공지능 운영체제 역을 맡은 스칼렛 요한슨은 오로지 목소리만으로 슬픔, 기쁨, 외로움, 아픔, 당혹감 등 다채로운 감정들을 표현하며 관객들을 사로잡았다.
이색적인 각본도 유수의 영화제를 통해 인정받았다. 제86회 아카데미시상식, 제71회 골든글로브시상식에서 각본상을 수상하며 '올해 가장 독창적인 로맨스'라는 평을 이끌어냈다.
영화제를 휩쓸어 난해한 예술영화라는 오해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녀'는 의외로 간단명료하다. 고독한 현대인들의 아픔을 달래줌과 동시에 디지털 세계에 빠져 소통이 단절된 우리네 모습을 직시한다. 실제로 버스나 지하철 안에서 사람들은 각자의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기에 바쁘다. 아무리 심심해도 스마트폰 하나면 친구가 따로 필요없을 정도다.
'그녀'의 주인공 테오도르(호아킨 피닉스 분)는 의뢰를 받고 편지를 대신 써주는 '아름다운 손편지닷컴'의 직원이다. 여자 못지않은 섬세한 감정과 필체를 지니고 있어 뛰어난 능력을 인정받는다.
그러나 중이 제머리 못 깍듯이 정작 자신의 삶은 외롭다. 아내에게도 달콤한 말과 배려심 대신 자신의 방식을 고집했고, 결국 이혼 소송을 진행하게 된다. 집에서는 3D게임이나 채팅을 하며 외로움을 달랜다. 하지만 채팅 상대도 늘 정상적이지 않다. 마음의 구멍을 채워줄 만한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다.
그러던 중 그는 인공지능 운영체제를 접하게 된다. 목소리만으로 소통하는 이 가상의 인물 이름은 사만다. 수많은 프로그램 개발자들의 성향이 조합된 운영체제이지만 스스로의 경험을 통해 진화하는 존재다. 육체만 없을 뿐 하나의 인격체와 다름없는 것.
사만다는 메일도 대신 읽어주고 테오도르가 미뤄놓은 모든 귀찮은 컴퓨터 작업들을 해결해준다. 뿐만 아니라 테오도르의 모든 감정을 이해하고 따뜻하게 감싸준다. 목소리만으로도 심리 상태를 알아차리고, 심지어 유머러스함까지 갖춘 그녀는 메마른 테오도르의 마음에 촉촉한 단비가 된다.
결국 둘은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 그러나 사만다는 사람이 아니기에 만날 수가 없다. 이로 인해 테오도르는 혼란을 겪고 이별을 선언한다. 하지만 사랑은 이성적으로 제어할 수 있는 감정이 아닌 법. 결국 그는 '그녀'를 마음 속에 받아들이게 되고 행복한 나날을 보낸다. 물론 사랑에는 끝이 있고 이들도 마냥 행복할 수만은 없다.
'그녀'는 가까운 미래를 배경으로 하는 아트버스터이다. 한 남자가 컴퓨터 운영체제를 통해 사랑과 소통을 배우는 모습을 담은 성장영화이기도 하다. 보기만 해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영상미가 마음을 사로잡는다. 사만다와 대화를 나누며 걸어다니는 테오도르를 지켜보면, 그가 혼자 있음에도 사랑의 기운이 퐁퐁 솟아난다. 뒤로 펼쳐지는 배경이나 색감이 따스해서 더욱 그렇다.
직장에서 쏟아지는 업무와 까칠한 상사 때문에 마음 고생 하는 이들, 현재 사랑을 하고 있는 이들이나 오랜 솔로 생활로 외로움과 친구가 된 이들 모두에게 이 영화를 강력추천한다. 잠자고 있던 감성이 깨어나는 색다른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고독한 현대인들의 마음에 술보다 더한 위로가 되는 영화. 자신의 현재 모습과 진짜 사랑에 대해 생각하고 반성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개봉은 오는 22일.
유수경 기자 uu84@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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