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지연진 기자]"슬픔과 답답함 때문일까? 복통이 제법이다. 밖에 나갈 엄두도 나지 않는다. 몸 상태도 그렇지만 가라앉은 기분 때문이다. 난 아직 울지 못했다. 쏟아지는 눈물을 꾹꾹 누르고 삼킨다. 내가 울 자격이라도 있나"(일반인 조 모씨가 21일 페이스북에 올린 글)
세월호 침몰 참사 닷새째. 대한민국이 집단 무기력증에 빠졌다. 슬픔의 깊이가 천길 낭떠러지로 우리를 내몰았다. 차디찬 바다속에 갇힌 그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하다. 밥 먹고 잠자고 일하는 일상도 죄스럽다. 세월호 구조 상황이 궁금해 뉴스 속보을 켰다가도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온 모습을 확인할 때면 슬픔이 북받쳐 텔레비전 전원을 끈다. 그때마다 리모컨을 쥔 손이 파르르 떨린다. 스마트폰으로 뉴스 속보를 한줄 한줄 읽을 때마다 가슴이 저려온다. 밤 잠을 설치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유 없는 근육통과 복통도 잇따른다. 가만히 하늘을 보면 눈물이 주르르 흐른다.
세월호 생존자와 희생자 유가족 등 사건 당사자들이 극심한 공포로 인한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 위험에 노출된 것과 마찬가지로 전 국민이 '집단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 세월호 침몰 과정을 생중계로 지켜보면서 수백명이 수몰되는 장면을 목격한 일반 국민들도 우울증 증상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세월호 침몰 초기 "구조될 수 있다"는 실낱 같은 희망으로 사고 수습 과정을 지켜본 국민들은 실종자들이 사망자들로 바뀌면서 크게 낙담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대리외상 증후군(Vicarious Trauma)'이라고 진단했다. 사고를 직접 겪지 않아도 방송을 통해 사고 장면을 목격하고, 비탄에 빠진 피해자의 가족을 지켜보면서 자신과 연관된 듯한 심리적 외상을 겪는 것이다. 미국에서도 2001년 9ㆍ11테러 사건을 목격한 맨해튼 거주자들이 집단 공황 상태를 경험하기도 했다.
세월호 침몰 이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선 자괴감을 호소하는 글들이 잇따르고 있다. 어린 학생들을 품고 서서히 침몰하는 세월호를 속수무책 바라보면서 느끼는 자책이다. 한 페이스북 이용자는 21일 "새로운 일주일이 시작되는 첫날이지만 깊은 바다속에서 구조를 기다리는 어린 학생들을 생각하니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내 자신이 부끄럽고 미안하다"고 썼다. 연세대 김호기 사회학과 교수도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우리 어른들은 '엄마, 아빠 사랑해'라는 말을 마지막을 남기는 아이들을 구해주지 못한채 우왕좌왕하는, 뒤늦게 분노하고 자책하는 것이 고작이다.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는 저 역시 침묵해야 하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고 토로했다.
사고 이후 정부의 우왕좌왕하는 모습에 분노와 불안을 느끼는 사람도 많다. 페이스북에선 "대한민국 국민으로 사는 것이 너무 힘들다", "입 만 열면 거짓말과 사기 치는 무능한 정부"라며 정부의 대응을 비판하는 글들이 봇물을 이루고 있다. 무기력과 분노를 느끼다 불안과 불신으로 이어지는 심리 변화를 겪는 대리외상 증후군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황재욱 순천향대서울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많은 국민들이 느끼는 심리 상태는 급성 스트레스 장애로 이 같은 증상이 한 달 이상 지속될 경우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로 발전할 수 있다"면서 "급성 스트레스 장애의 경우 대부분 스스로 극복하지만 다른 위험 요소로 한달이 지나도 증상이 계속될 경우 치료를 받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슬픔과 죄책감은 애도의 자연스러운 과정일 수 있는 만큼 감정을 억누르지 않는 것이 좋다는 지적이다. 하지만 세월호 관련 보도를 접할 때마다 눈물을 흘리는 등 과도한 반응을 보인다면 텔레비전을 보지 않는 것이 좋다고 전문가들은 조언했다.
지연진 기자 gyj@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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