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황후가 된 고려여인 기순녀②
한때 고려에 유배됐던 순제는 보라매를 사랑했고
매처럼 총명한 기순녀에게 반해 총애하기 시작했는데…
황후 타나시리의 질투 속에, 정치 암투를 벌여 살아남은 그녀
#분노의 황후와 사랑의 황제 사이에서
황후 타나시리(答納失里)가 이 사실을 알게 되자 질투의 불을 뿜었다.
"당장 그 고려 계집을 데려오너라."
황후 앞에 끌려온 순녀는 머리를 조아리고 엎드렸다.
"네가 감히 요사스러운 언행으로 황제의 눈을 어지럽히고 마음을 흔들었느냐?"
"저는 다과를 시봉하는 일을 하였을 뿐이며, 폐하의 말씀에 대답을 드렸을 뿐이며, 폐하의 명에 따랐을 뿐입니다."
"이년이 말은 잘 하는구나. 어느 앞이라고 감히 혀를 놀리느냐?"
타나시리는 채찍을 들어 기순녀를 후려쳤다. 그때 순녀는 울면서 말했다.
"죽을 죄를 지었사옵니다. 조심하고 절제하여 황후폐하의 뜻을 받들겠습니다."
기순녀가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이 있었다. 타나시리의 친정은 황제 못지 않은 권력을 지닌 명문가였다. 그의 아버지 태평왕 앤티무르는 장남인 명종을 제치고 동생 문종을 황제로 내정한 실력자였다. 쟁쟁한 가문의 딸이며 황제의 정실(正室) 황후인 타나시리에게 대적하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기순녀는 몸을 숙였을지언정 마음은 더욱 꼿꼿이 세웠다. 그에게는 순제라는 더 큰 힘이 있었다. 고려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순녀는 황제의 속마음을 읽어냈다.
"폐하는 어떻게 고려로 유배가게 되었습니까?"
"아버지가 부당한 죽음을 당하고 난 뒤였지."
"부당한 죽음이라고요?"
"나의 부친, 명종(코실라) 황제는 재위 8개월 만에 앤티무르의 사주를 받은 숙부 문종(톡 테무르)에게 암살당했어. 동생이 형을 죽인 거지. 그리고 숙부는 제위에 올랐고 황태자였던 나를 이듬해 고려로 유배 보냈지. 대청도라는 곳, 몽골에서는 '쳉헤르 아랄'이라고 부르는데, 잊을 수 없는 곳이지."
"앤티무르라면?"
"황후 타나시리의 부친이시지."
"세상에… 그런데 왜 하필 그 먼 고려로 보냈을까요?"
"앤티무르의 반대세력이 나를 옹립하려는 기류가 있었어. 숙부 문종은 나를 죽이는 것은 원하지 않았어. 그래서 아무도 모르는 곳에 비밀리에 숨겨놓고자 했을 거야. 내가 현실적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을 때 숙부는 나를 중국의 계림으로 옮겼지."
"그럼, 어떻게 다시 황실로 복귀하셨는지요?"
"숙부 문종이 승하하면서 형을 죽인 가책에 오래 시달렸는지, 유언으로 명종(형)의 아들에게 황제 자리를 물려주라고 했다더군. 앤티무르 가문 사람들은 우선 내 동생인 이린지발을 제위에 앉혔지. 그런데 동생이 43일 만에 숨을 거두고 말았어. 상황이 이렇게 되자 그들은 다시 나를 불러 절대로 배덕(背德)하지 말 것을 맹세하게 한 뒤 황제가 되는 것을 허락했지. 그리고 나를 묶어놓기 위해 앤티무르의 딸인 타나시리와 결혼시킨 거야."
"어머나. 그럴 수가…."
"사실 내가 황제이기는 하지만, 황후가 가문을 업고 나를 쥐락펴락하는 형국이 되어 있지."
"폐하. 힘을 내시옵소서. 천하는 정의를 향해 움직일 것입니다. 저를 만나게 된 것도 고려에서 폐하가 다졌던 서원(誓願)을 이루라는 뜻일 것입니다."
"이루 말할 수 없이 고마운 말이로구나."
"망극하오이다."
#순제와 해동청 보라매의 비밀
어느 날 궁궐에서 순제는 순녀에게 이런 말을 했다.
"내가 왜 방마다 매를 달아두는지 아는가?"
"글쎄요. 저도 그것을 기이하게 생각했습니다."
"저 매는 고려의 대청도에 날아오는 해동청 보라매(고려산 1년생 매, 송골매)야. 내가 그곳에 가게 된 것도, 매사냥을 좋아하는 몽골인들이 매를 찾아 고려까지 들어왔다 보라매의 명산지인 그곳을 알아뒀기 때문이지. 나는 그곳에서 가까운 장산곶에서 날아오는 장산곶 매를 보며 마음을 달랬지. 저 매는 바로 그때의 내 마음이야."
"폐하. 그 마음이 이제 날개를 펴실 때가 되었습니다."
타나시리를 전혀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파악한 기순녀는 더욱 적극적이고 대담하게 황제에게 접근해 육체적 친밀감을 키워가며 전략적 충고를 하기 시작한다. 순녀에게 깊이 사랑을 느낀 순제는 궁궐에 들어온 지 2년이 되던 해에 그를 제2황후로 책봉하겠다고 발표한다. 타나시리 가문은 격렬하게 반발한다.
"황제가 제정신이 아닌가 봅니다. 태조 칭기즈칸 이래 황후는 모두 옹기라트(翁吉剌) 가문에서 맞이하는 몽골의 전통을 어디에 팽개치고 이런 일을 저지른다는 말입니까? 이것은 황실의 위엄을 깨는 일이면서 우리 가문에 대한 중대한 도전입니다."
황제가 그런 반발에 아랑곳하지 않고 일을 진행하자 황후의 형제들은 순제를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이런 쿠데타 시도가 있을 것을 예견한 사람은 기순녀였다. 그는 황제에게 말했다.
"그들이 가문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반드시 황제를 갈아치울 음모를 꾸밀 것입니다. 황제께서는 백성에게 존경받고있는 대신인 승상 빠앤(白顔)을 불러 이 문제를 미리 논의하십시오. 그리고 대응 시나리오를 짜 역모를 차단하시면 될 것입니다."
타나시리 친정 가문의 계획은 사전에 드러났고 황후의 오빠들은 모두 제거되었다. 황후에게도 사약이 내려졌다. 타나시리가 죽자 순녀는 이제 자신이 황후가 될 것이라 믿고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쿠데타를 막는 데 앞장섰던 승상 빠앤이 고려 여인을 황후에 앉히는 것에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몽골의 전통을 깨는 것이 옳지 않다는 의견이었다. 빠앤은 관직 이름만 해도 246자에 달했던 당대 최대 공신(功臣)이었다. 그의 반대는 결정적이었다. 1337년(순제 5년) 옹기라트 가문의 빠앤후두(伯顔勿都)가 황후가 된다.
#황후는 사약을 받고, 순녀는 실세로
그러나 일련의 사건을 거치면서 기순녀가 원나라 황실의 실세(實勢)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실력자인 빠앤은 순제의 배후세력인 기순녀를 경계했다. 그의 세력을 약화하기 위해 중요한 연결고리인 환관 고용보를 공격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1339년 원의 감찰어사 이직(李稷)이 고용보를 탄핵했다. 고려 출신 환관이 황제의 신임을 등에 업고 조정을 문란하게 하면서 고려인을 끌어들여 나라의 기강을 흔들고 있다고 그는 주장한다.
이런 탄핵이 기순녀를 은근히 지목하고 있음은 두 말할 나위도 없었다.
순녀는 순제에게 고용보의 탄핵이 자신을 겨냥한 것이라는 점을 설명했다. 그러나 섣불리 나서지 않았다. 빠앤의 '실력'이 상당하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가만히 때를 기다렸다. 1339년 순녀는 황제의 아들(아유시리다라)을 낳았다. 그 무렵 그는 순제의 스승인 샤라빤(沙剌班)을 만났다.
"승상 빠앤이 자신의 실력을 믿고 황제를 능멸하니 황실의 권위를 되찾을 방안이 필요합니다. 황제의 스승께서 길을 일러주십시오."
샤라빤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순제는 빠앤을 정계에서 축출하는 데 성공했다. 사라빤은 빠앤이 물러난 뒤 황제에게 기순녀를 제2황후로 책봉할 것을 건의한다. 눈물을 참으며 국경을 넘어 공녀로 끌려온 고려 소녀 기순녀는 당시 세계를 지배하던 원 제국의 황후가 되었다. 제1황후가 있었지만 순제를 사로잡은 그의 힘은 그야말로 살아있는 권력이었다. 원나라 황실에서 주목받은 고려 여인은 몇 명 더 있었다. 7대 황제인 쿠빌라이 세조(1260~1294)의 총애를 받은 이씨, 10대 인종 황제(1312~1320)의 영비(英妃)가 된 여인 등. 그러나 기순녀처럼 황실에서 자력으로 살아남아 천하를 호령하게 된 경우는 없었다.
항복한 나라의 '노리개 여인'이 몽골 지배권력의 중심에 들어가 세상을 먹어버리는 어마어마한 생존 에너지는 분명 이 겨레의 DNA 어느 구석엔가 들어있을 것이다. 순녀 스토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니, 진짜 이야기는 지금부터인지 모른다.
<11월13일자 34면에 계속>
1편 바로가기 : 몽골황후가 된 고려여인 기순녀① 죽기보다 못하다면 자결하리다
빈섬 이상국 편집부장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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