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일이 지난 것을, 올해도 뒤늦게 알게 됐다. 적어도 내가 기억하기로는 미역국을 먹은 기억은 없다. 그래서 '아무도 생일을 기억하지 않는 자'의 설움과 슬픔이 북받쳤다, 라고 얘기하려는 건 결코 아니다. 오히려 생일을 축하받는 것에 익숙지 않은 세대로서, 생일 케이크의 촛불을 불어 끌 때면 느끼곤 했던 쑥스러움과 어색함을 겪지 않아 홀가분한 편이다.
다만 언젠가부터 생일 즈음할 때면, 혹은 생일이 지난 것을 나중에 알고 나서는 '생일'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된다. 축하를 받고 더러 선물을 받기도 하는 날로 알고 살아왔던 생일이라는 날의 의미에 대해 잠시 생각을 하게 됐다. 생일의 의미에 새로운 가르침을 준 것은 박경리 선생의 '토지'의 곰보 목수 윤보였다.
"생일이라는 것은 열 달 배 실어서 낳아주신다고 고생한 어매한테 정성 바치는 날이라 말이다"고 그는 말했다. 그가 손재주가 출중한 목공이자 동학군을 이끌었던 장수일 뿐만 아니라 어느 선비 이상의 현자임을 느끼게 해준 가르침이었다.
정말 그래야 할 것이다. 생일은 축하를 받는 날이자 감사의 날이어야 할 것이다. 자신을 있게 해 준 부모에게 감사와 정성을 바치는 날이어야 마땅할 것이다. 어디 부모뿐이겠는가. 세상의 모든 인연, 그로부터 받는 은총에 고마움을 표하는 날이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은총에의 보답은 결국 자신에게 스스로 묻는 것에 의해 이뤄진다. 자신의 '생(生)'을 스스로 묻고 확인하는 것이다.
'生'이란 글자가 새싹이 땅 위로 솟아나는 모양을 본뜬 것이듯 '생'은 무엇보다 태어난 그 순간이지만 그 한순간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건 태어남과 함께 '살아 있음'이며, '자라나는' 것이며,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일은 한순간이 아니라 매 순간이며, 과거가 아니라 현재이며, 한 번의 행위가 아니라 끝없는 과정이다. 우리는 과거의 한순간이 아니라 매 순간마다 태어나는 것이며, 그러므로 어느 하루가 생일이 아니라 날마다 생일인 것이다.
다석 유영모 선생은 자신이 산 날을 하루하루 셌다고 한다. 91년을 살다 간 그는 그렇게 3만3200일을 살았다. 그에게는 매일매일 산다는 것은 그 날이 진짜 '살아 있으며' '자라나며' '나아가는' 날인지를 스스로 묻는 날이었다. 그래서 그에겐 따로 생일이 없었다. 그러나 미역국도, 선물도 없었지만 그의 생일들은 그 누구보다 풍요로운 생일이지 않았을까 싶다.
이명재 사회문화부장 promes@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