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응룡 한화 이글스 감독은 최근 개인 통산 1500승의 금자탑을 이뤘다. 지난 3일 창원 마산구장에서 열린 NC 다이노스와 원정 경기다. 선발 송창현의 호투와 이대수의 2타점 결승 3루타에 힘입어 4-2 역전승을 거뒀다. 이 승리로 김응룡 감독은 71세에 한국 프로야구 사상 첫 번째로 1500승 고지를 밟았다.
당분간 깨지지 않을 대기록이다. 2위 김성근 고양 원더스 감독이 1234승이니 상당한 격차가 있다. 김응룡 감독은 해태 타이거즈, 삼성 라이온즈 등 우승권 구단을, 김성근 감독은 쌍방울 레이더스, 태평양 돌핀스 등 우승권과 다소 거리가 먼 구단을 주로 맡았으니 당연한 결과다. 김성근 감독이 선전한 결과로 볼 수도 있다.
통산 3위는 김인식 전 두산 베어스 감독으로 980승을 일궜다. 김재박 전 LG 트윈스 감독과 강병철 전 롯데 자이언츠 감독이 각각 936승과 914승으로 그 뒤를 잇는다. 이들은 모두 일선에서 물러났다. 국내 스포츠 여건으로 볼 때 현장 복귀는 쉽지 않아 보인다. 최근 제10구단 KT 위즈가 50대 초반인 조범현 전 KIA 타이거즈 감독을 초대 사령탑에 선임한 점만 봐도 그러하다.
1983년 해태 지휘봉을 잡은 김응룡 감독은 데뷔 두 번째 경기인 그해 4월 5일 광주 삼성전에서 첫 승리를 거뒀다. 이후 1991년 5월 14일 광주 삼성전에서 500승째를 올렸고, 1993년 9월 7일 광주 OB 베어스전에서 700승, 1998년 5월 24일 광주 롯데전에서 1000승 고지에 올랐다.
1983년부터 2000년까지 해태에서만 활동하며 1164승을 거둔 김응룡 감독은 2001년부터 2004년까지 삼성에서 312승을 보탰다. 이어 올해 한화 사령탑으로 일선에 복귀해 24승을 추가, 마침내 대망의 1500승을 이뤘다. 23시즌 만에 거둔 값진 기록이다.
호사가들은 김응룡 감독이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승리를 올릴 수 있었다고 입을 모은다. 근거는 두어 가지가 있다. 원년인 1982년 더그아웃에 있지 않았단 점과 프로야구 초창기 해태보다 높은 전력의 구단을 맡았다면 프로야구 역사가 꽤 달라졌을 것이란 가정이다. 해태는 1983년 에이스 이상윤과 김일권-김성한-김봉연-김종모-김무종(재일동포) 등으로 이어지는 ‘김 씨 타선’에 힘입어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1984년에는 4위에 머물렀고, 선동열이 시즌 중반 합류한 1985년에는 3위를 했다.
1982년 3월 27일 동대문운동장에서 삼성과 MBC 청룡의 프로야구 원년 개막전이 펼쳐졌을 때 김응룡 감독은 태평양 건너 미국에 있었다. 그때 김응룡 감독이 한국에 있었다면 프로야구 6개 구단 초대 사령탑 명단엔 적잖은 변화가 있었을 것이다. 김응룡 감독의 각종 기록도 지금과는 꽤 달랐을 것이라는 게 호사가들의 얘기다.
한국 야구가 세계무대에서 처음 정상에 오른 건 1977년 니카라과 슈퍼월드컵이다. 당시 우승을 이끈 김응룡 감독의 나이는 36세였다. 현재 프로야구에는 이병규(LG), 이승엽(삼성) 등 36년 전 김응룡 감독보다 나이가 많은 선수들이 그라운드를 누빈다.
1978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 3위, 1980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 준우승 등을 거두며 그 무렵 국내 야구계 최대 목표였던 ‘극일’을 이룬 김응룡 감독은 얼마 지나지 않아 요즘 프로구단에 버금가는 실력을 갖고 있던 실업야구 강호 한일은행 감독 자리를 임신근에게 넘겼다. 대신 1981년 5월 대한야구협회의 우수 야구인 국외 연수 프로그램에 따라 미국으로 떠났다.
당시 김응룡 감독은 한국에 프로야구가 생긴다는 걸 알 턱이 없었다. MBC 문화방송이 창사 20주년을 맞아 축구의 할렐루야처럼 하나의 프로구단을 만들겠단 얘기가 오고갔지만 그 이상의 구체적인 얘기는 나오고 않고 있었다.
아무튼 김응룡 감독은 4개월의 랭귀지 코스를 거쳐 그해 9월부터 남조지아대학교에서 석사 과정을 밟았다. 미국 생활 2년째에 접어든 1982년 국내 야구계에는 1904년 야구가 들어온 지 78년 만에 프로야구가 출범했다. 일본리그 타격왕 출신인 재일동포 백인천(MBC), 1950년대 홈런왕 박현식(삼미 슈퍼스타즈), 경북고를 전국 최강으로 이끈 서영무(삼성), 일본리그에서 선수생활을 한 김영덕(OB), 1960년대 김응룡과 함께 한국 대표팀의 중심타선을 이룬 박영길(롯데), 심판 출신으로 ‘빨간 장갑의 사나이’로 인기를 누리던 김동엽(해태)이 6개 구단의 초대 사령탑에 올랐다.
리그는 한 시즌을 마치기도 전에 이곳저곳에서 파열음이 났다. ‘아시아의 철인’으로 불렸던 박현식 삼미 감독이 부진한 성적으로 한 달을 버티지 못하고 하차했다. 4월 25일 춘천 OB전에서 2회까지 8-0으로 앞서다 11-12로 패한 것이 결정적인 원인이 됐다. 구단 고문으로 밀려난 그의 공백은 이선덕 코치가 메웠다. 그해 삼미는 전기 리그에서 10승 30패, 후기리그에서 5승 35패를 기록했다. 누가 지휘봉을 잡아도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해태는 김동엽 감독이 유남호, 조창수 등의 코치진과 마찰을 일으켜 시즌 시작 한 달이 겨우 지난 4월 29일 조창수 감독 대행 체제로 전환했다. 이 체제는 시즌 끝까지 이어졌다. 당시 해태는 5승 8패를 기록하고 있었다.
국내에 있었다면 어느 구단이든 초대 사령탑 0순위로 올려놨을 김응룡 감독은 그해 가을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했다. 그리고 10월 18일 해태 구단의 제 2대 감독으로 선임됐다.
여기서 하나, 대한야구협회가 의욕적으로 추진했던 우수 야구인 국외 연수 프로젝트는 프로 출범 이후 변화된 상황과 협회 살림살이 문제 등으로 중단됐다. 처음이자 마지막 수혜자인 김응룡 감독이 연수 과정을 제대로 마치지 못했으니 프로젝트는 프로화의 그늘에 가려져 버렸다고 할 수 있겠다.
신명철 스포츠 칼럼니스트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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