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악한 할리우드 영화감독이라면 ‘번뜩’였을 게다. 어쩌면 이미 '시나리오'를 머릿속에 그렸을지 모른다. 보스턴 마라톤 테러는 그만큼 충격이었다. 세계적 마라톤 축제의 한복판에서, 테러 무기로는 생소한 압력솥이 터져, 아빠의 완주를 응원하던 8살 꼬마(130여명의 사상)가 사망하는, 극적인 스토리가 촘촘히 엮였다. '테러범 형제' 타메를란ㆍ조하르 차르나예프가 '모범시민'이었다는 지인들의 증언도 섬뜩하다. '선을 가장한 악의 얼굴'은 일상에선 그렇게 환한 미소를 짓는다. 현실은 때론 영화보다 잔인한 법이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테러 충격에도 의연한 미 국민들을 영웅으로 치켜세웠지만 무엇보다 테크놀로지의 공이 컸다. 선혈이 낭자한 아비규환을 실시간으로 전한 트위터, 생사를 넘나드는 일촉즉발의 상황을 가족ㆍ친지들에게 실어 나른 휴대폰 문자 메시지. 어디 그뿐인가. 스마트폰으로 촬영한 테러 현장 동영상은 인터넷을 뒤덮었고 수사 제보로 이어졌다.
미 연방수사국(FBI)은 시민들의 제보 자료에 힘입어 사고 현장 통화 기록과 감시카메라(CCTV)를 분석하며 포위망을 좁혀갔다. 이 과정에서 FBI가 분석한 영상 데이터는 10TB(테라바이트). 미국 의회도서관 전체 자료와 맞먹는 방대한 양이다. 사진과 동영상, 통화 자료의 '조각 맞추기'를 통해 테러 상황은 재구성됐고 나흘만에 범인은 체포됐다. 수많은 데이터에서 '가치'를 찾아내는 '빅 데이터(Big Data)'의 쾌거다. 기업(정부)이 제품 생산 과정(용의자 추적)에 소비자(대중)를 참여시켜 양질의 결과물을 도출하는 '크라우드 소싱'(Crowd Sourcing)의 재발견이기도 하다.
여론의 평가는 후하다. 월스트리트저널은 '경찰ㆍ시민, 그리고 테크놀로지가 보스턴 테러 수사에 일조했다'는 기사에서 시민과 네티즌의 감시, 스마트폰과 CCTV가 범인을 찾는 데 기여했다고 전했다. USA투데이는 '하이테크 기기가 보스턴 수사를 어떻게 도왔나'라는 부제의 기사를 통해 첩보영화를 방불케하는 디지털 기술들을 조명했다. 자경단(vigilante)과 디지털(Digital)을 합친 디지털감시단(Digilante)이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했다. 하늘에는 위성, 거리에는 스마트폰과 CCTV, 그리고 실시간 정보를 공유하는 SNS까지, 24시간 물샐틈없는 '디지털감시'의 서막이다.
내친 김에 '감시의 눈'을 확대하자는 주장이 잇따른다. 보수 강경파 피터 킹 하원의원(공화당)은 "(수사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동영상을 분석했는지 모르지만 앞으로 CCTV가 더 많이 필요해졌다"고 역설했다. 마이클 블룸버그 뉴욕 시장도 "5년 내 뉴욕의 모든 곳에 CCTV를 설치하겠다"고 선언했다.
악에 대한 테크놀로지의 강력한 응징. 그런데 안도의 한숨에 드리워진 그림자는 뭘까. '디지털감시'라는 어감이 주는 으스스함이다. 범죄자가 아니면 무슨 걱정이냐고 타박하지 마라. 집단의 분노가 테크놀로지와 맞물리면 총구는 되레 선량한 시민을 향할 수 있다.
고교생 살라 에딘 바르훔(17)은 상상이나 했을까. 자고나니 보스턴 폭발 테러범으로 몰려 '뉴욕 포스트' 1면에 사진이 실리면서 생명의 위협을 받았으니 말이다. 그의 고통을 '개인의 불운'으로 덮는 것은 잔인한 일이다. 디지털감시 시대, 선량한 피해자는 지구촌 어디서나 존재할 수밖에 없다.
조지오웰은 소설 '1984'에서 시민들이 권력에 감시받는 빅브러더 세상을 성토했다. 영화 '트루먼 쇼'(1998년)는 집단의 사생활 엿보기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아날로그 시대의 우울한 예언은 디지털 시대에 여전히 유효하다.
정의를 빙자한 권력의 시민 감시, 이성을 잃은 집단의 엿보기는 또 다른 악이다. 공공의 정의를 지키는 것만큼 개인의 삶을 보호하는 것은 퇴색될 수 없는 사회적 가치다. '나는 네가 지난 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는 공포 영화 제목은 단연코 현실이다. 거듭 말하지만, 현실은 영화보다 잔인하다.
이정일 산업2부장 jay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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