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정치세력이 등장해 판이 흔들릴라 치면 기존 정치권은 '정치쇄신'을 들고 나와 방어막을 치고는 했다. 국회의원 총선거나 대통령 선거 때면 단골로 내세우는 것도 '정치개혁'이다. 하지만 새 정치세력의 동력이 약하다 싶거나 선거가 끝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손바닥을 뒤집었다. 정치권 스스로 쇄신의 진정성을 손상하고 국민의 불신만 더 키웠다. '정치쇄신'이란 말 뒤에 늘 '회의적(懷疑的)'이라는 꼬리가 따라붙는 까닭이다.
'4ㆍ24 재보선'을 앞두고 벌어지고 있는 시군구 기초자치단체장과 기초의회의원 무공천 논란만 해도 그렇다. 새누리당과 민주통합당은 지난해 대선 때 기초 선거 후보자의 정당 공천을 폐지하겠다고 약속했다. 정당의 책임정치 구현, 후보자 사전 검증 등 당초 취지와 달리 지역 국회의원이 공천권을 쥠에 따라 지방자치가 중앙정치에 휘둘리는 결과를 낳았다. 공천 헌금 비리도 끊이질 않았다. 폐단을 인정하고 무공천을 공약한 것이다.
그러나 새누리당은 후보 등록일(4일)이 코앞인데도 우왕좌왕이다. 공직후보자추천위원회는 '풀뿌리 민주주의 활성화', '대선 공약'을 내세워 무공천으로 가닥을 잡았다. 그러나 최고위원회의가 제동을 걸었다. 일부 의원들도 가세했다. '민주당은 공천하는데 우리만 공천을 안 하면 선거 패배가 뻔하다'는 이유에서다. 기초 의석 몇 자리가 국민과의 약속보다 더 중요한가. 정치적 신뢰를 저버리는 몰염치한 행태다.
민주당도 별반 다르지 않다. 관련 법이 고쳐지지 않았다는 구실로 공천을 강행할 태세다. 현행 공직선거법엔 정당의 기초선거 후보 추천을 '할 수 있다'로 돼 있다. 안해도 그만이다. 법을 고치지 않아도 약속을 지킬 수 있다는 얘기다. 더구나 안철수 전 서울대 교수가 출마하는 서울 노원병 국회의원 보궐선거에는 후보를 내지 않기로 했지 않은가. 개정의 필요성을 스스로 부인하는 자가당착이다. 여야의 속내는 뻔하다. 기초단체장과 의원들을 선거 때 운동원으로 동원하는 등 공천권 행사에 따른 이득을 놓지 않겠다는 것이다.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 미적대는 쇄신안은 또 있다. 지난해 말 활동을 끝낸 국회정치쇄신 특위는 지난 1월 국회의원의 영리 목적 겸직 금지, '의원 연금' 원칙적 폐지, 국회 폭력 예방 및 처벌 강화 등 10개 쇄신 법안을 발의했다. 의원 겸직 금지 법안이 국회를 통과하면 국회의원은 변호사, 대학교수 등을 겸직할 수 없게 된다. 의원연금도 원칙적으로 폐지되고 그동안 지원금을 받아 온 전직 의원도 1년 미만 재임한 경우 등은 빠져야 한다.
하지만 어느 하나 법제화한 것은 없다. 2월 국회에서도, 3월 국회에서도 별다른 논의 없이 지나갔다. 제19대 국회의원 가운데 3분의 1가량인 96명이 변호사, 기업 대표, 사외이사, 교수 등을 겸직하고 있다. 의원 연금은 단 하루만 의원직을 유지해도 65세 이후 매월 120만원을 받을 수 있는 특권이다. 겸직과 연금, 달콤한 특혜를 쉽게 버리겠느냐는 우려가 그대로 맞아떨어진 셈이다.
'국회의원 세비 30% 삭감' 약속도 미적거리긴 마찬가지다. 여야가 대선 과정에서 안철수 전 교수의 제안으로 마지못해 수용하기로 했던 의원 정수 축소도 선거가 끝난 뒤에는 누구 하나 거론하는 이가 없다.
국회는 지난달 22일 본회의에서 또다시 정치쇄신특위를 구성하기로 했다. 쇄신특위는 의원의 영리목적 겸직 금지, 의원 연금 제도 개선, 세비 30% 삭감, 국회 폭력 처벌 강화, 선거구획정위원회 운영 개선방안 등을 논의할 예정이다. 오늘부터는 여야 6인협의체도 가동해 정치쇄신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로 했다고 한다. 이번에는 다를까? 역시나 '회의적'이다.
어경선 논설위원 euh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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