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박병희 기자]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이 5일(현지시간) 58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베네수엘라는 14년의 차베스 시대를 종료하고 새 시대를 맞이하게 됐다. 그가 반미주의 대표주자이자 남미 좌파 세력의 대부 격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차베스의 죽음이 국제사회에 미칠 영향도 적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블룸버그 통신에 따르면 이날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부통령은 암과 싸우던 차베스 대통령이 오후 4시25분 카라카스 군 병원에서 숨을 거뒀다고 밝혔다.
지난해 10월 대통령 선거에서 4선에 성공, 6년 임기의 대통령에 다시 선출된 차베스 대통령은 네 번째 임기를 제대로 시작도 해 보지 못 하고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동안 끊임없는 의혹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건강하다며 네 번째 대통령직을 수행할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끝내 병마에 쓰러지고 말았다.
차베스 대통령은 네 번째 암 수술을 위해 쿠바로 떠났던 지난해 12월10일 이후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대신 지난달 15일 병상에 누워 두 딸과 함께 활짝 웃는 모습의 사진을 공개하며 자신의 건강악화설을 무마시키려 애쓰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지우마 호세프 브라질 대통령은 차베스의 사망에 대해 돌이킬 수 없는 막대한 손실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그는 브라질이 항상 차베스의 뜻에 동의한 것은 아니었지만 한 명의 친구를 잃어버렸다고 말했다. 또 호세프 대통령은 차베스는 그를 필요로 하는 이 대륙의 모든 사람들에게 관대한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백악관도 이날 차베스 사망 발표 직후 성명을 통해 오바마 대통령이 차베스 사후 베네수엘라와 건설적인 관계를 마련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는 뜻을 전했다고 밝혔다.
차베스는 1954년 7월28일 베네수엘라 바리나스주 사바네타에서 태어났다. 교사였던 부모 밑에서 평범한 유년 시절을 보냈던 차베스는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해 군인의 길을 택한 후 정치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젊은 군 장교를 모아 정치그룹을 조직했고 이는 향후 차베스가 정치인으로 성장하는 발판이 된다.
차베스는 1992년 2월 동료 장교들과 쿠데타를 일으켰다가 실패했고 당시 자신이 책임지겠다며 2년간 옥살이를 했다. 이 때 대중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다.
차베스는 1998년 대선에서 56%의 지지율로 첫 대통령 당선에 성공했고 신헌법 하에서 치러진 2000년 대선에서 60%의 지지율로 재선에 성공했다.
2002년 4월11일 유혈사태로 얼룩진 반정부 시위와 일부 군부세력의 반정선언으로 대통령 자리에서 축출됐지만 국제사회의 비난과 그의 복귀를 바라라는 지지자들에 힘입어 이틀만에 다시 대통령직에 복귀한다. 당시 그는 자신의 반대 세력과 대화에 나서겠다고 약속하는 동시에 반정 세력을 지지했다며 미국을 맹비난하기도 했다.
2006년 차베스는 2009년 대통령 연임제한 규정을 철폐한 국민투표에서 승리하며 종신 대통령을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 차베스는 2006년 12월 대선에서 63%의 지지율로 세 번째 대통령에 당선됐다.
차베스 대통령은 빈민층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 깊은 관계에 있는 쿠바에 석유를 제공하는 대신 의료진을 대거 파견받아 무상의료를 확대했고, 각종 보조금 혜택도 민중들에게 돌려주면서 국민의 40%를 차지하는 극빈층으로부터 '위대한 지도자'라는 영웅같은 칭호를 받아왔다.
하지만 외국 기업을 임의대로 국유화하거나 정부 정책에 반대 목소리를 내는 민영 언론사 압박, 기업 규제, 외환통제같은 정책으로 독재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특히 2006년 유엔 총회에서 차베스가 당시 조지 부시 대통령을 악마(the devil)로 지칭하는 등 미국과는 깊은 갈등 관계를 빚어왔다. 이 때문에 중산층 이상에서는 적지 않은 반발을 샀다.
차베스는 '혁명의 아이콘'으로 대접을 받아온 카스트로의 이념적 후계자라는 평을 받았다.
베네수엘라 헌법에 따르면 대통령 사망시 30일 이내에 선거가 치러져야 한다.
박병희 기자 n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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