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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유산이 이런 대접받는 나라

시계아이콘읽는 시간02분 08초

쓰레기장 같은 폐자재 더미·정문앞 신호등과 철탑·일대 흉물스런 모습


유네스코 유산이 이런 대접받는 나라 창덕궁 정문인 돈화문 앞마당에 좌회전 신호를 위한 신호등이 떡하니 자리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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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오진희 기자] '관람객들에겐 엄격, 그러나 정작 문화재 주변 관리는 허술'. 문화재 관리 당국의 이중적인 행태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관람객들에겐 매우 경직적인 관람 예절을 요구하면서 정작 문화재 주변의 관리에서는 허술한 '두 얼굴'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29일 찾은 서울 종로구 돈화문로. 이 길은 우리나라 4대 고궁 중의 하나이면서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인 창덕궁 정문 돈화문에서 종로 3가까지 이어진 연장 약 800m 도로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 한양의 궁궐들이 모두 불타면서 창덕궁이 경복궁을 대신해 법궁으로 사용돼 왔다. 돈화문로는 왕이 행차하던 길이기도 했다. 지금의 세종로와 같은 역할을 했다.

현재 이 도로는 왕복 일차선으로 비좁은 데 비해 차량통행량이 많은 편이다. 이에 비해 횡단보도는 드물어 대부분 이 도로를 건너는 주민들은 무단횡단을 하기 일쑤였다. 돈화문로는 올 상반기부터는 '주말동안 차없는 거리'로 운영될 예정이지만, 걸어 다니기엔 불편한 형편이다. 더욱이 곳곳에 설치된 큼직한 교통 이정표들과 도로 양편으로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외래종 나무인 플라타너스가 창덕궁의 시야를 가리고 있다. 창덕궁의 조망을 가리는 것은 이것만이 아니다. 심지어 좌회전 신호를 표시하기 위한 교통신호등이 돈화문 바로 앞에 떡하니 자리해 흉물스런 모습이다. 맞은편엔 교통통행량을 집계하는 카메라들이 장착된 철탑도 우뚝 서 있다.


유네스코 유산이 이런 대접받는 나라 돈화문로. 잎이 다떨어진 플라타너스들이 양쪽에 빼곡히 서 있는 가운데 차량통행량이 많은 길이다. 곳곳에 이정표와 카메라들이 장착된 철탑이 보인다.


돈화문 건너편에선 벌써 1년 넘게 공사장 땅 바닥이 파헤쳐진 채 방치돼 있다. 폐자재와 움푹 패인 웅덩이에다 원래 이 자리에 있던 주유소의 기름탱크 자리가 그대로 드러나 있다. 가림막이 설치돼 있긴 하지만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재의 허술한 관리 실태를 보여준다. 이 사업은 창덕궁 맞은편 돈화문로를 사이에 두고 자리했던 주유소 부지 두 곳에 궁중생활사디지털전시관과 국악예술당을 건립키로 한 것이다. 외국인관광객들에게 우리문화를 소개하고 전통공예품을 면세로 판매하기 위해 만들어진 한국문화 정품관 건물 높은 곳에서 바라본 흉칙한 모습이 창덕궁의 이미지를 훼손시키고 있다는 지적이다. 정품관은 지난해 하반기 창덕궁 맞은편에 설립됐다.


정품관 옥상에서 자주 창덕궁을 내려다본다는 박현 한국학연구소장은 "외국인들을 정품관에 초대해 창덕궁을 소개할 때, 바로 밑에 공사현장의 쓰레기 더미나 오물들이 보여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면서 "돈화문길 각종 신호등과 이정표, 플라타너스 나무 모두 창덕궁의 역사적 의미나 격을 생각하지 않고 방치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박 소장은 이어 "지난 2003년 창덕궁 입구에 있던 민영환 동상은 일본인관광객이 늘어나자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견지동 조계사 경내에 옮기더니, 정작 주변 정비에는 소홀한 것 같아 안타깝다"고 덧붙였다.


조선시대에 270년간 정궁으로 쓰인 대표적 고궁이자 세계적 문화유산인 창덕궁 일대에 대한 역사문화거리 조성계획은 5년 전에 수립됐지만, 여태 기본적인 정비조차 이뤄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관할 구청인 서울 종로구청 관계자는 "이미 검토는 되고 있으나, 구체적인 계획이 나오지 않았다"고 말했다. 서울시 문화정책과 관계자 역시 "2008년부터 이 일대 정비를 계획했지만 토지 수용에서 시간이 꽤 많이 걸리게 됐다"며 "정품관에서 내려다보이는 공사 폐자재 문제는 미처 몰랐는데 시정토록 하겠다"고 해명했다.


유네스코 유산이 이런 대접받는 나라 한국문화정품관 4층 창덕궁을 한눈에 내려다볼수 있는 공간으로 마련된 라운지에서 본 모습. 정품관 바로 앞에 과거 주유소 부지를 서울시가 매입해 '궁중생활사디지털전시관'을 짓는 공사계획이 잡혀 있다.


이 같은 허술한 관리 실태는 창덕궁 관람객들에게 매우 엄격한 관람 수칙을 요구하는 것과 대조적이다. 최근 창덕궁 내 후원을 예약 관람한 이정신(48)씨는 "후원 일대를 돌아다니는 동안 '줄을 이탈하지 말라', '안내하는 길 밖으로는 절대로 다니지 말라'는 말을 얼마나 많이 들었는지 모르겠다"면서 "관람 도중 급한 일이 있어 먼저 나오려고 하자, 처음에는 안 된다며 허락하지 않다가 거듭 요구하자 마지못해 허가해 줘 돌아올 수 있었지만 직원들은 왜 함부로 돌아다니느냐면서 마치 불순분자 보듯 하는 표정이었다"고 말했다. 또 다른 관람객 김덕현씨(36)는 "문화재를 소중히 보호하는 건 좋으나 관람객들에겐 엄격하면서 정작 문화재 주변 관리에는 허술한 이중성은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이상근 문화재제자리찾기 공동대표는 "아무리 오래된 집도 사람이 드나들어야 썩지 않는데, 만들어놓고 관리만 하는 식의 정책이 여전히 고수되고 있는 것"이라며 "우리문화재에 대해 시민참여형의 입체적인 접근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창덕궁은 창경궁과 함께 경복궁 동쪽 궁궐이라 해 '동궐'로 불렸다. 남쪽에는 국가 사당인 종묘가, 북쪽엔 왕실 정원인 후원이 있다. 법궁인 경복궁에 이어 이궁으로 창건됐지만 임진왜란 후 경복궁이 재건될 때까지 270여년동안 법궁으로 사용됐다. 창덕궁은 1991년부터 본격적인 복원사업이 시작됐고, 이어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오진희 기자 val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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