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의 자판을 들여다보면 왼손 위쪽의 알파벳이 QWERTY로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QWERTY형 자판'은 원래 오타수정 기능이 없고 자판을 힘주어 쳐야 했던 구형 타자기 시절에 만들어졌다. 자판배열이 효율적이면 타자를 너무 빨리 치게 돼 오타가 자주 나기 때문에 일부러 비효율적으로 설계된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기술이 발전하고 컴퓨터가 등장하면서 오타는 얼마든지 수정이 되고 자판에 손가락을 대기만 해도 글씨가 찍히는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비효율적인 'QWERTY' 자판을 쓰고 있다. 효율성을 50% 이상 업그레이드한 새로운 타자기 자판이 등장했으나 기존의 타자 시스템에 익숙해진 사람들이 아무도 새 자판을 쓰려하지 않아 여전히 쓰이고 있다. 사람들이 비효율적인 시스템에 '영원히 감금'되어 버린 것이다. 이것이 기술적 비가역성(technical irreversibility)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기술뿐만 아니라 경제 제도에도 한 번 도입되면 절대로 바꿀 수 없는 비가역성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재정과 예산 항목에서 가장 비가역성이 크고 대대손손 세대를 넘어 영향을 미치는 제도는 무엇일까? 바로 복지제도다. 첫째, 불특정 다수의 국민들에게 국가가 복지를 약속하는 만큼 나중에 문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절대로 되돌이킬 수 없고 둘째, 처음 약속할 때는 경제적 이슈이지만 나중에 이를 회수하려고 할 때는 사회적 파장이 큰 정치적 이슈가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재정상황이 극도로 악화한 그리스나 이탈리아, 프랑스 등에서 연금개혁을 하려고 해도 전시상황에 가까울 정도의 파업과 폭동이 일어나고 국민적 저항에 부딪혀 번번이 실패하는 것도 바로 이같은 비가역성 때문이다. 주목할 점은 지금 연금개혁에 결사적으로 반대하는 현 세대는 흥청망청 연금을 써 버린 앞전 세대에 의한 가혹한 피해자라는 것이다.
2013년도 한국의 복지예산은 민간위탁 복지사업까지 합쳐 103조원 규모로 증가해 언론의 머릿기사 그대로 '총지출의 30%', '복지예산 100조원 시대'를 열었다. 정부뿐만 아니라 각 지자체들이 경쟁적으로 복지예산을 늘려 전국 244개 광역ㆍ기초지자체 중 복지비 비중이 예산의 50%를 넘는 곳은 작년 말 28곳으로 늘었고 30% 넘은 곳도 부지기수다.
잘못되면 나중에 되돌릴 수 있는 다른 예산과 달리 복지예산은 설령 나중에 비효율적인 것으로 판단되더라도 되돌릴 수 없고 영원히 지속된다는 특징이 있다. 복지예산 100조원 시대에 우리도 복지 선진국이 되고 있다는 기쁨 한편으로 적지 않은 우려가 여기저기서 나오는 이유다. 복지예산도 그렇지만 이를 집행하는 중앙정부나 지자체가 효율적으로 복지시스템을 점검하고 관리하고 있느냐는 질문에 이르러서는 더 큰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잘못하면 복지예산의 큰 몫이 엉뚱한 중간 관리비용으로 사용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복지예산의 증가와 사용은 선거 때 등장하는 여야의 즉흥적이고 선심성 정치공약에 의해서가 아니라 미리 시간을 두고 철저하게 연구되고 검증된 이후 사회적 합의에 따라 차분하게 결정되어야 할 것이다. 또 무작정 총액을 늘리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 반드시 필요한 계층에게 돌아가도록 분배하고 운영상 낭비가 없도록 신중하게 집행돼야 한다.
복지예산에 신중해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복지가 현 세대와 미래 세대 간의 분배 이슈이기 때문이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미래 세대에게 아무런 양해 없이 현 세대가 덜컥 돈을 써 버리고 그 비용을 나중에 지불하라고 하는 것은 양심 없는 일이다. 훗날 미래 세대에게 당신들을 위해서도 꼭 필요한 예산집행이었다고 떳떳하게 설명할 수 있는 생산적 복지가 되어야 할 것이다.
홍은주 한양사이버대 경제금융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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