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9년 드비어스 회장 취임...입바른 말과 나눔경영 빛나
[아시아경제 박희준 기자] '다이아몬드는 영원하다'. 한때 전세계 다이아몬드 원석의 90% 가량을 공급하는 등 지난 한 세기 동안 다이아몬드산업에서 독점기업으로 군림한 드비어스의 광고문구다. 드비어스는 1888년 창업이래 120여년 동안 다이아몬드의 유통량과 가격을 결정한 드비어스는 지난해 종말을 고했다.
86년간 회사를 경영한 오펜하이머 가문이 지난해 8월 51억 달러를 받고 지분의 40%를 넘기면서 드비어스 경영에서 손을 떼 금광과 다이아몬드 시장을 호령한 '오펜하이머 다이아몬드 왕조'는 종지부를 찍었기 때문이다.
오펜하이머가문은 3대가 86년 동안 족벌 세습경영을 하고 유통망을 독점한 가문이라는 비판을 받았다.동시에 남아프리카의 흑백인종 차별정책에 저항하고 후진국에 병원과 학교를 건립하는 등 사회적 책임을 다한 계몽된 아프리카의 기업가 가문이라는 칭찬도 받은 가문이다.
◆1세기만에 광산업에서 손뗀 오펜하이머 가문=오펜하이머 가문은 지난 해 8월 광산업에서 공식으로 손을 뗐다.남아프리카공화국의 광산업체이자 가문 시조가 창업한 앵글로아메리카가 드비어스의 지분 40%에 대한 51억 달러를 현금으로 입금했기 때문이었다.
오펜하이머 가문대표이자 어니스트의 손자인 니컬러스 오펜하이머(67) 드비어스 전 회장은 2011년 11월 지분매각 결정후 발표문을 내고 "가문 미래를 위해 지분매각 제안을 받아들였다"고 밝혔다.
그는 "우리가문은 100여년 이상 다이아몬드 업계에 몸을 담았고 80여년간 드비어스의 일부였기에 매각결정은 매우 어려웠다"고 털어놨다.
지분매각 배경은 여러 가지다. 호주의 BHP빌리턴과 리오 틴토,러시아의 알로사 등 글로벌 광산업체들이 아프리카와 러시아, 캐나다 등에서 다이아몬드를 캐고 있어 유통망을 통제할 수 없는 게 한가지다. 또 가격하락으로 수익성이 하락하고 있고 비상장 가족경영체제로는 자본투자를 지속할 수 없다는 점도 한몫을 했다.
니컬러스 전 회장은 "싱가포르 국부펀드인 테마섹과 합작회사를 설립해 아프리카의 농업부문과 소비재 부문, 일부 광업부문에 투자하기로 했다"고 앞으로의 계획도 밝혔다. 그는 2011년 2월 앵글로아메리칸 회장직에서 물러나고 같은 해 8월 'E 오펜하이머 앤 선'이라는 가문지주회사를 통해 싱가포르 테마섹 자회사와 '타나 아프리카 캐피털'이라는 합작사를 설립하는 등 독립준비를 차근차근 했다.
그의 아들 조너선(43)도 '마이닝 위클리' 인터뷰에서 "에티오피아의 타나 호수가 블루 나일강의 발원지이듯 타나아프리카는 개발의 원천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가시적이고 긍정적인 유산을 남기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3대 86년의 다이아몬드 왕조=오펜하이머 가문은 독일 태생의 유태인 어니스트 오펜하이머가 일궈 3대가 부귀영화를 누렸다.
시가상인의 아들인 어니스트는 16살에 10살위 형이 근무하고 있는 친척의 다아이몬드 중개회사인 둔켈스불러(Dunkels buhler& Company)에 합류하기 위해 영국 런던으로 건너갔다.그는 선별공으로 입사해 5년간 일하면서 다이아몬드에 관한 모든 것을 배웠다.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였던 22살의 나이에 회사를 대표하는 바이어로 아프리카 킴벌리로 파견됐다.
어니스트는 다이아몬드 사업을 하면서 나미비아의 채굴권도 사들였다.1차대전이 터지고 1915년 영국의 호화여객선 루시타니아호가 독일 잠수함에 격침되자 아프리카 곳곳에서 반독일 시위가 벌어져 그는 영국으로 돌아왔다.그는 미국 엔지니어의 도움으로 1917년 반유태인 친영국 양키자본의 대명사 미국 JP모건 은행으로부터 지원을 받아 자본금 100만 파운드의 앵글로아메리칸 금광회사를 설립했다. 본심은 다이아몬드 독점회사 드비어스 이사회 진출에 있었다.
영국인 세실로즈가 유태계 금융재벌 로스차일드의 자금을 받아 1888년 창업한 드비어스는 1900년대에 다이아몬드 상인연합체인 '다이아몬드 신디케이트'로 유통채널까지 장악한 아프리카 최대 다이아몬드 업체였다.
그는 '야심찬 졸부'로 퇴짜를 맞았지만 굴하지 않고 드비어스 주식이 시장에 나올 때마다 사들여 1926년 대주주가 됐다. 대공황이 터진 1929년에는 회장에 취임해 마침내 꿈을 이뤘다.
그는 1957년 세상을 뜰 때까지 30년간 회장직을 유지했다.그는 다이아몬드생산자협회를 만들어 남아공의 다이아몬드 생산업체를 드비어스의 통제아래 뒀다.자식농사도 잘 지었다. 아들과 손자를 모두 영국 명문 옥스퍼드 대학에 보내 교육을 받고 가업을 잇게 했다. 아들 해리는 앵글로아메리칸과 드비어스 회장직을 각각 1982년과 1984년까지 맡았고 손자 니컬러스는 각각 1983년과 1988년 앵글로와 드비어스의 회장직에 있다 물러났다.
◆'다이아몬드 왕조' 캐시카우=해리는 1960년대와 1970년대 다이아몬드 산업이 번창하는 토대를 쌓았다.
특히 해리는 호주와 시베리아,서 아프리카 등에서 다이아몬드가 속속 발견되면서 드비어스의 독점이 잠식당하자 중앙판매기구(CSO)를 통해 물량을 사들여 가격을 조절하고 유통망의 지배력을 유지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CSO는 생산업체의 원석 판매량과 가격을 규제했지만 오펜하이머 가문에는 판매가의 15~20%라는 엄청난 수수료를 가져다준 '캐시카우' 역할을 했다.
오펜하이머가문은 CSO를 통해 한때 전세계 다이아몬드 원석의 90%를 지배하고 부를 축적했다. 미국의 경제주간지 포브스는 지난해 니컬러스 전 회장의 순 자산 가치를 64억 달러로 추정하고 아프리카 2위, 세계 139위의 억만장자로 평가했다.오펜하이머 가문은 비상장 가족경영 체제를 유지한 탓에 정확한 재산규모는 알 수 없다.
◆사회공헌이 가문장수의 진짜 비결=오펜하이머 가문에는 아프리카 자원수탈자는 비판이 늘 따라붙는다.니컬러스가 1980년대 시에라 리온의 내전이 다이아몬드 지배를 둘러싼 군벌간의 대립이라는 내용을 담은 '블러드 다이아몬드'라는 영화가 나온 이후 서방으로부터 호된 비판을 받은 것은 단적인 예이다.
그렇지만 오펜하이머 가문은 '입바른 말'을 하고 책임을 다한 가문이라는 평판도 받고 있다.어니스트는 1924년 의회에 진출, 대공황시절에는 광산 국유화로 압박하는 정부에 광산폐쇄로 맞섰다.해리는 흑백분리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를 반대하는 정당과 언론을 후원했다.그는 아버지를 기념해 '해리 오펜하이머 재단'을 설립해 장학금을 지급하며 후학을 길렀다. 니컬러스는 합법으로 채굴된 다이아몬드만 매입하도록 하는 이른바 '킴벌리 프로세스'도 도입해 블러드 다이아몬드 이슈해결에 나섰다.그는 "남아공에 대한 가문의 복무"와 "남아공과 그 미래에 대한 약속"도 강조했다.
뉴욕타임스(NYT)는 2008년 8월 "아프리카의 비극적 역사에서 아프리카의 자원을 수탈한 대부분의 대기업들과 달리 드비어스는 보츠와나를 약탈만 하지는 않았다"고 높게 평가했다.
박희준 기자 jacklond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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