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bar_progress

글자크기 설정

닫기

[충무로에서] 모든 것을 기억하는, 무서운 사람들

시계아이콘01분 38초 소요

[충무로에서] 모든 것을 기억하는, 무서운 사람들 김도현 국민대 경영학 교수
AD

저는 지금 하버드 대학에서 방문학자로 머물고 있습니다. 보스턴의 겨울은 춥고 눈도 많이 오는 것으로 악명이 높지만, 요즘 서울 날씨 소식을 듣고 있노라면 이곳의 날씨가 한참 더 따뜻한 것 같습니다.


얼마 전만 해도 교수들이 연구년에 해외에 체류하는 것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던 때가 있었습니다. 자료수집이 그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였지요. 외국 연구자들과의 공동연구도 물론 중요하고요. 그러나 이제 인터넷 접속이 되기만 하면 자료를 구하는 일은 세계 어디에서도 가능해지고 있고 외국 연구자와의 공동연구도 원격으로 얼마든지 가능하니, 연구년을 해외에서 보낼 이유는 많이 줄어들고 있는 셈입니다. 하지만 외국생활의 여러 가지 불편함에도 이곳에서 새삼 깨닫게 되는 것들이 없지는 않습니다.

무엇보다, 우리 기업들의 세계적인 경쟁력에 대해 느껴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전자와 자동차산업의 강세를 실감하게 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유통, 물류, 금융이나 콘텐츠처럼 아직 상대적인 열세로 평가돼 왔던 산업영역에서도 이제 우리 기업들이 세계와 경쟁해 볼 만한 상황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자료와 통계를 근거로 분석해 내기는 힘들지만, 이곳에서의 몇몇 경험을 통해 그런 '느낌'을 가져 볼 수 있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이곳 친구들의 무서운 저력을 실감하게 하는 일들도 있습니다. 최근 제가 감탄한 것은 이들의 '기억력'입니다. 요 며칠 박물관과 미술관들을 돌아보면서 이들의 징그러운 기억력을 느껴 볼 수 있었습니다. 전시실마다 기부자의 이름을 붙이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지만 계단 난간, 대형 전등, 프로젝터 등에도 예외 없이 기부자의 이름이 꼼꼼히 새겨져 있는 광경은 기가 질릴 지경이었습니다. 150여년 전 수백달러를 기부한 사람의 이름까지 되새김질하고 있다니! 그러나 이런 꼼꼼한 기억은 잠재적인 기부자의 지갑을 여는 데 큰 역할을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자신의 기부가 오래 기억되고, 투명하게 쓰일 것이라고 믿을 수 있을 테니 말입니다.

이 친구들의 기억력이 힘을 발휘하는 지점은 또 있습니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막 소위 재정절벽(fiscal cliff)을 완화하기 위한 법안이 하원을 통과했다는 뉴스가 나오고 있습니다. 점쟁이는 아니지만, 저는 통과를 낙관했습니다. 언론과 여러 시민단체들이 통과되지 않으면 생길 문제들에 대해 여론을 환기시켜 정치권을 강하게 압박하는 장면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언론보도에서 흥미로웠던 점은 재정절벽 법안의 향후 영향을 분석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지금 상황의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할 수 있는 2010년의 세금감면 법안 폐기, 2011년의 예산통제 법안 제정 등의 과정에 대해 계속 기억을 환기시켰다는 점입니다. 과연 누가, 왜, 어떤 방식으로 지금의 위기를 만들어냈으며, 그래서 양당 가운데 어떤 쪽이, 더 구체적으로 어떤 의원이 지금 상황을 해결해야 할 보다 직접적이고 중요한 책임을 지고 있는지 국민들이 알아차릴 수 있도록 말이지요.


과거가 기억된다는 것은 사실 아주 무서운 일입니다. 저 역시 제 실수와 잘못이 사람들의 뇌리에서 빨리 잊혀지기를 바라며 삽니다. 그러나 공적인 영역에서 누군가 우리 시대에 일어나는 일들을 꼼꼼히 기록하고, 오래도록 기억하며, 그리고 널리 알리는 역할을 담당한다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일입니다.


이들의 지긋지긋한 기억력에 혀를 내두르면서, 두툼한 다이어리를 주문했습니다. 올해에는 제 손으로 직접 기록을 만들어 보려 합니다. 성실한 기록을 통해 조금 더 무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날 작정입니다.  






김도현 국민대 경영학 교수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AD
AD

당신이 궁금할 이슈 콘텐츠

AD

맞춤콘텐츠

AD

실시간 핫이슈

AD

놓칠 수 없는 이슈 픽

  • 25.12.0607:30
    한국인 참전자 사망 확인된 '국제의용군'…어떤 조직일까
    한국인 참전자 사망 확인된 '국제의용군'…어떤 조직일까

    ■ 방송 : 아시아경제 '소종섭의 시사쇼'■ 진행 : 소종섭 정치스페셜리스트■ 연출 : 이미리 PD■ 출연 : 이현우 기자 우크라이나 전쟁에 참전했다가 사망한 한국인의 장례식이 최근 우크라이나 키이우에서 열린 가운데, 우리 정부도 해당 사실을 공식 확인했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매체 등에서 우크라이나 측 국제의용군에 참여한 한국인이 존재하고 사망자도 발생했다는 보도가 그간 이어져 왔지만, 정부가 이를 공식적으로 확

  • 25.12.0513:09
    김용태 "이대로라면 지방선거 못 치러, 서울·부산도 어려워"
    김용태 "이대로라면 지방선거 못 치러, 서울·부산도 어려워"

    ■ 방송 : 아시아경제 '소종섭의 시사쇼'(월~금, 오후 4~5시)■ 진행 : 소종섭 정치스페셜리스트 ■ 연출 : 박수민 PD■ 출연 : 김용태 국민의힘 의원(12월 4일) "계엄 1년, 거대 두 정당 적대적 공생하고 있어""장동혁 변화 임계점은 1월 중순. 출마자들 가만있지 않을 것""당원 게시판 논란 조사, 장동혁 대표가 철회해야""100% 국민경선으로 지방선거 후보 뽑자" 소종섭 : 김 의원님, 바쁘신데 나와주셔서 고맙습니다. 김용태 :

  • 25.12.0415:35
    강전애x김준일 "장동혁, 이대로면 대표 수명 얼마 안 남아"
    강전애x김준일 "장동혁, 이대로면 대표 수명 얼마 안 남아"

    ■ 방송 : 아시아경제 '소종섭의 시사쇼'(월~금, 오후 4~5시)■ 진행 : 소종섭 정치스페셜리스트 ■ 연출 : 이경도 PD■ 출연 : 강전애 전 국민의힘 대변인, 김준일 시사평론가(12월 3일) 소종섭 : 국민의힘에서 계엄 1년 맞이해서 메시지들이 나왔는데 국민이 보기에는 좀 헷갈릴 것 같아요. 장동혁 대표는 계엄은 의회 폭거에 맞서기 위한 것이었다고 계엄을 옹호하는 듯한 메시지를 냈습니다. 반면 송원석 원내대표는 진심으로

  • 25.12.0309:48
    조응천 "국힘 이해 안 가, 민주당 분화 중"
    조응천 "국힘 이해 안 가, 민주당 분화 중"

    ■ 방송 : 아시아경제 '소종섭의 시사쇼'(월~금, 오후 4~5시)■ 진행 : 소종섭 정치스페셜리스트 ■ 연출 : 이미리 PD■ 출연 : 조응천 전 국회의원(12월 1일) 소종섭 : 오늘은 조응천 전 국회의원 모시고 여러 가지 이슈에 대해서 솔직 토크 진행하겠습니다. 조 의원님, 바쁘신데 나와주셔서 고맙습니다. 요즘 어떻게 지내시나요? 조응천 : 지금 기득권 양당들이 매일매일 벌이는 저 기행들을 보면 무척 힘들어요. 지켜보는 것

  • 25.11.2709:34
    윤희석 "'당원게시판' 징계하면 핵버튼 누른 것"
    윤희석 "'당원게시판' 징계하면 핵버튼 누른 것"

    ■ 방송 : 아시아경제 '소종섭의 시사쇼'(월~금, 오후 4~5시)■ 진행 : 소종섭 정치스페셜리스트 ■ 연출 : 이경도 PD■ 출연 : 윤희석 전 국민의힘 대변인(11월 24일) 아시아경제 '소종섭의 시사쇼'에 출연한 윤희석 전 국민의힘 대변인은 "장동혁 대표의 메시지는 호소력에 한계가 분명해 변화가 필요하다"고 진단했다. 또한 "이대로라면 연말 연초에 내부에서 장 대표에 대한 문제제기가 불거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한동훈 전


다양한 채널에서 아시아경제를 만나보세요!

위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