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2일 발생한 부산도시철도 추돌사고의 원인은 앞뒤 전동차 모두 기관사가 안전수칙을 지키지 않은 때문인 것으로 드러났다. 경북 구미에서 최근 발생한 불산 누출 사태도 기억이 생생하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안전불감증의 사례다. 그 원인을 짚어 볼 때가 됐다. 유사한 경우로 과거 대구 지하철 화재 사고, 최전방 북한군 귀순사건, 정부청사 방화사건이 머리 속을 스쳐간다. 매번 사태가 발생할 때마다 모두가 우리 사회의 안전불감증에 대해 날카롭게 진단한다. 대형사고가 예고돼 있었다든가 사고 대응 지침이 허술했다는 식의 지적이 단골 메뉴다.
도대체 사전에 어떤 조치를 취하지 않았기에 이런 사태가 끊이질 않는 것일까. 현장 작업자들이 자신의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는 것은 유사시 자신의 직무가 무엇인지를 평소 모르고 있다는 뜻이 된다. 이걸 숙지하게 하려면 평소 직무기술서를 외우고 다닐 정도가 돼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사회의 어느 직장에도 직무기술서가 존재하질 않는다는 것이다.
필자가 미국에서 일할 때의 일이다. 근무발령 받은 첫날 직무기술서를 담당부장으로부터 전달받았다. 단 세 쪽으로 된 직무기술서만 주고는 아무 연수과정도 없었다. 그 뒤 맡은 업무를 수년간 수행했다. 사무실 책상 옆 벽에 기술서를 꽂아놓고 하루 몇 차례씩 읽어 보면서 일했던 것이 생각난다.
나의 직무 범위가 어디까지인지를 스스로 파악하는 데 있어서 직무기술서만큼 도움되는 것은 없다. 미국에서 귀국한 후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됐다. 우리나라에서는 어느 직장에서도 직무기술서를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다. 설령 있다 하더라도 작업자들이 현장에서 즉각적으로 사용할 수는 없는, 단지 기술서를 위한 기술서 수준의 업무 매뉴얼이 있을 뿐이다. 매뉴얼 속에 기술돼 있는 문장 형태의 내용을 보면 금방 이해할 수 없는 내용들로 가득 차 있다.
매뉴얼이 존재한다 해도 문제점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학교를 다닐 때에는 표준어와 표준 문장을 구사하지만, 직장에 취업하면 그날부터 문법과 동떨어진 직장 특유의 언어를 구사하게 되고 이를 당연시하는 것이 풍토화되다시피 했다. 이 지적에 대해 의문이 든다면 사내 보고서나 사내 품의서, 또는 사내 규정집을 지금이라도 한번 들여다 보라. 정체불명의 표현법이 직장 언어에서 통용되고 있다는 점을 어렵지 않게 간파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직장 언어는 문어체도 아니고 구어체도 아닌 희한한 형태다. 정체불명의 언어가 현실에서 사용되는 것이다. 주어가 생략되기도 하고 목적어도 증발하기도 한다. 주어답지 않은 주어가 사용되는 경우가 흔하고 목적어답지 않은 목적어도 자주 쓰인다. 사고 대응 지침서가 존재한다 하더라도 실효성이 떨어질 가능성이 높은 것은 이 같은 직장 언어 구사의 정체불명성 때문이다.
직장인의 직무기술서에서 신문기자 수준의 언어를 요구하는 것은 분명 무리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다. 직무기술서를 일단 쓰게 하고 고칠 점은 없는지 전문가로 하여금 검토하게 하면 충분하다. 작성 단위는 개인이 담당하고 있는 단위 업무 하나에 대해서 작성하는 것이 합당하다.
예를 들면 직원 각자 세 쪽 정도로 자신의 담당직무에 대한 기술서를 쓰도록 하는 방식이 있다. 구성원 전체가 순서를 정해 쓸 필요는 없다. 각자 독자적으로 작성하면 된다. 이런 방식으로 회사 전체 직무기술서를 완성하는 데 1, 2주면 충분하다. 실용성 있는 직무기술서가 없다면 대형사고는 언제든지 다시 일어날 수 있다. 안전불감증의 근본적인 치유를 말하면서 업무기술서를 빼놓아서는 안된다.
문송천 카이스트 테크노경영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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