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이은정 기자] 26일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은 단호했다. 평소 조용하면서도 압축적으로 내놨던 말투와는 달랐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대표를 만나고 나서다. 중기 대통령이 되겠다고 선언하는 동시에 대기업을 국민기업으로 규정한 박 당선인의 이날 발언은 이례적이라고 할 만큼 직설적이었다. 한 재계 관계자는 "21세기를 살고 있지만 여전히 과거처럼 바뀌는 정권이 재계, 대기업 길들이기에 나선다는 느낌이 들었다"며 당혹해 했다.
정권 초기의 재계 길들이기는 과거 박정희 대통령 시절부터 이어졌다. 삼성그룹만 하더라도 5ㆍ16 주체인 박정희 소장의 군사 쿠데타 직후 일명 사카린 밀수사건인 '한비사건'으로 곤혹을 치른바 있다. 전두환 대통령 시절 역시 초기 군사정권 위세에 눌렸고 김영삼ㆍ노무현 대통령 시절 역시 초반에 대기업들이 불법 정치자금 수사 등으로 견제를 받았다.
재계와 새 정권의 불편한 관계가 잠시 끊겼던 적은 5년전 이명박 정부 출범 당시다. 이 대통령은 당선 9일만인 2007년 12월28일 재계 총수와 첫 간담회를 열고 재계의 건의사안을 실천할 국가경쟁력위원회란 기구를 선물로 줬다. 재계 총수의 목소리를 직접 들을 수 있는 핫라인도 설치했다. 이 대통령은 이후 '비즈니스 프렌들리'(친기업정책)를 강조하면 두 달 동안 기업 관련 일정을 12번 소화했다.
하지만 5년만에 다시 새 정권과 재계는 불편한 관계로 돌아가게 됐다. 경제민주화 열풍이 거세던 선거기간의 분위기가 고스란히 이어진 결과로 해석하더라도 중소기업중앙회 방문을 사실상 첫 공식일정으로 시작한 박 당선인의 행보 자체는 적지않은 점을 의미하고 있다. 선거기간 내놨던 경제민주화 관련 공약을 실천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재계의 신규순환출자금지 규제완화요청에 박 당선인이 구체적인 답변을 하지 않고 화제를 다른 것으로 돌린 것도 재계로서는 부담이다. 특히 재계가 주목하는 대목은 박 당선인이 재계 총수를 만난 자리에서 대기업을 국민기업으로 규정한 속내다. 이날 간담회 후 회장단들이 이구동성으로 '화기애애하고 좋았다'고 평가했지만 속내는 국민기업 의미를 놓고 크게 술렁였던게 사실이다.
10대 그룹에 속하는 한 대기업 관계자는 "대기업을 국민기업이라고 개념화했지만 관련 설명에 당혹스러웠다"며 "대기업이 국민의 뒷받침과 희생, 국가지원을 통해 성장했기 때문에 국민기업이라고 표현한 것 자체가 기업에 부담이 될 수 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박 당선인이 대기업을 이같은 시각으로 보고 있다는 점에서 앞으로 실제 어떤 정책을 펼지 파악하느라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고 덧붙였다.
또 다른 대기업 관계자도 "회동 후 박 당선인이 최근 발언한 100% 대한민국, 중기대통령, 국민기업 등의 행간을 다시 파악하느라 분주했다"며 "박 당선인은 단호할 정도로 개념정리를 명확히 했지만 솔직히 의미하는 바를 모르겠다"고 토로했다.
재계는 박 당선인이 '서민들이 하고 있는 업종까지 재벌 2ㆍ3세들이 뛰어들거나 땅이나 부동산을 과도하게 사들이는 것은 기업 본연의 역할 아니다'고 지적한 것에도 당혹해 하고 있다. 재벌 2ㆍ3세들이 빵집이나 커피판매점, 패션, 식음료 소매업, 교육서비스업, 웨딩서비스업 등 중기영역을 잠식하고 있는 현상을 총수들에게 직접 경고한 것으로 향후 파장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한 기업 관계자는 "2ㆍ3세 관련 발언을 빵이나 부동산에 한정하기 했지만 결국 지배구조 개선 얘기와 맞물리는 상황"이라며 "중소기업을 살리겠다는 의지만으로 경제를 살리기 힘든게 현실인데 중소기업 중심의 정책을 강화하면서 대기업에 대한 압박 강도가 거세질까 걱정된다"고 말했다.
한편 전경련은 박 당선인의 발언이 대기업에 큰 부담을 주는 내용은 아니라며 확대해석을 경계했다. 전경련 관계자는 "경제민주화 요구가 거센 상황에 대기업 총수를 만나기 쉽지 않은 상황이었는데 7일만에 만났다는 점 자체가 의미 있다"며 "박 당선인이 대기업과 중소기업 입장을 모두 듣고 협의하겠다고 말한 만큼 경제민주화가 일방통행으로 가진 않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은정 기자 mybang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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