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리더십 키워드 11-정도전의 왕도정치
"자질 부족한 왕 만나면 백성이 도탄 빠져"
"신하가 왕 잘 이끌어야"...조선경국전 집필
[아시아경제 조슬기나 기자]왕의 정치가 아닌, 신하의 정치를 꿈꿨다. 뜻 하나를 품고 대의멸친을 외친 그는 스승을 버리고 어려서부터 함께 공부해 온 벗과도 갈라섰다.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고려의 멸망을, 새롭게 시작되는 조선왕조 기반을 설계했다. 삼봉 정도전(1342~1398)의 이야기다.
태조 이성계와 정도전의 만남은 1384년(고려 우왕 10년) 이뤄졌다. 관직에서 물러나있던 정도전은 여진족 호발도의 침입을 막기 위해 함경도에 있던 이성계를 찾았고, 이후 이성계의 책사가 돼 조선의 건립을 주도했다.
정도전은 평소 취중에 "한나라 고조가 장자방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장자방이 한고조를 이용했다"고 말하곤 한 것으로 전해진다. 자신이 꿈꾸는 이상적 왕도정치를 위해 자신이 이성계를 이용했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정도전은 문무를 겸비한 사상가이자 실천적 정치가로 평가된다. 왕이 중심이 아닌, 백성이 중심이 되는 국가를 만들기 위해 개혁을 주장하고 직접 실행에 옮겼다. 고려 말기,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벼슬길에 오른 그는 이인임, 경복흥이 원나라 사신접대를 맡기자 이에 반발해 유배형에 올랐다.
이 때 정도전이 원나라 사신 접대를 했다면 유배를 떠나지 않고 대세를 따라 편안한 삶을 살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정치적 소신과 정면 배치되는 선택을 하지 않았다. 원칙이 흐트러지면 개혁의 명분도 사라지기 때문이었다. 경복흥을 찾아간 그는 "내가 영접사로 가면 원나라 사신의 목을 베든지, 체포해 명나라로 보내겠다"고 말했고 결국 파직돼 유배됐다.
유배지인 전라남도 나주로 떠나며 그는 아내에게 "예전 내 친구들은 형제보다 정이 깊었으나, 내가 패한 것을 보고 뜬 구름처럼 흩어졌다"고 허망함을 전했다. 그러나 9년간의 유배기간은 그의 인생에 중요한 전기가 됐다. 비록 먹을거리를 걱정해야 하는 어려운 삶이었지만, 직접 백성들과 접촉하고 대화하면서 고려 조정에 대한 백성들의 시선을 알 수 있었다.
특히 이 기간 농민들이 권세가에 땅을 뺏기고 소작민이 되거나 노비로 전락하는 삶을 바로 옆에서 지켜본 그는 '백성이 가장 귀하고, 사직(관리)은 다음이며, 군주가 가장 가볍다'는 크나 큰 깨달음을 얻게 된다. 왕이 중심이 아닌, 백성이 중심이 되는 국가가 만들어져야 한다는 생각을 확고히 하게 된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신하의 역할이 중요했다. 정도전은 "진정한 선비란, 백성의 이익을 옹호하기 위해 발벗고 나서 투쟁하는 이"라며 도덕과 학문 또한 "백성의 이익을 위해 체득하고 실천해야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정도전은 수령의 덕목을 강조했다. 수령은 백성들과 가장 가까이서 만나는 관리이기 때문이다. 그는 수령에게는 재능보다 덕이 중요하다고 언급했다. 덕이 재능에 미치지 못하면 백성들에게 가혹한 관리가 될 수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수령의 역할로는 인구를 늘리고 학교를 진흥시키고 풍속을 바로 잡고 재판과 형벌을 공정히 할 것을 강조했다.
정도전은 단지 생각에만 머물지 않는, 실천적 정치가였다. 고려 말기 추진한 토지개혁이 대표적이다. 그는 국가가 토지를 몰수해 공전으로 만든 다음 백성 수대로 나누는 계구수전 방식의 과전법을 주장했다. 비록 권세가의 반대로 모든 지역에서 이뤄지지 못하고 직역자에게만 주는 방식으로 후퇴했으나, 이 같이 백성을 나라의 뿌리로 보는 그의 실천적 사상은 이후 백성들의 새왕조 개창 지지로까지 이어지는 토대가 됐다.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옹호하는 근대헌법의 토대가 된 마그나카르타가 서양에 등장한 것이 17세기다. 그러나 정도전은 이미 3세기 앞선 시기에 같은 생각을 했다. 이는 맹자의 사상에서 영향을 받았다. 맹자는 왕과 지배층이 백성을 핍박하거나 수탈을 일삼으며 이들의 생존을 위협할 경우, 백성이 왕에게 저항하고 자신들을 위한 새로운 나라와 왕을 세울 수 있다고 말했다. 인을 해친 자는 더이상 왕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은나라가 주나라에 의해 망할 때, 맹자는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 주왕을 벤 것은 왕을 벤 것이 아니라 범부 한 명을 벤 것"이라 말했다.
정도전은 자질이 부족한 왕이 나타날 경우 왕도정치의 위험성에 대해 고민했다. 그 피해는 곧 국민이 입게 되는 까닭이다. 때문에 그는 왕보다 왕의 선정을 이끄는 신하가 중요하다고 봤다. 또한 한 사람으로 좌지우지 되는 정치가 아닌, 법제를 통해 시스템화된 이상적 정치를 구현하려 했다.
정도전만큼 역사적으로 양극단의 평가를 받은 이도 드물다. 그는 유학의 대가이자 조선의 기틀을 닦은 설계자로 평가된다. 조선의 법전인 경국대전의 근간이 되는 조선 경국전의 집필자기도 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고려왕조를 배신한 변절자이자 의리 없는 인물로 낙인찍혀 과소평가되기도 했다.
왕조 개창공신임에도 왕조 내내 역적의 오명을 뒤집어 쓴 인물이기도 하다. 이는 1398년(태조 7년)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이방원과의 세력다툼에서 밀렸기 때문이다. 왕이 중심이 되는 국가를 원했던 이방원에게 정도전은 위험한 민본사상을 갖는 이였을 것이다. 정도전은 조선조 내내 신원 되지 않다가 고종 때서야 관직이 회복됐다.
(도움말: 현대경제연구원)
조슬기나 기자 se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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