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리더십 키워드 9-세한도로 본 추사 김정희
스승향한 이상적의 지조..권력·돈 좇는 세태에 교훈
[아시아경제 조슬기나 기자]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歲寒然後知松栢之後凋). 바다 건너 제주 유배지에서 쓸쓸이 환갑을 바라보고 있던 추사 김정희는 제자 우선 이상적에게 보낸 세한도에 이 같은 문구를 인용했다. 논어(論語)의 자한(子罕)편에 나오는 글귀로, 추운 겨울이 돼서야 잣나무와 소나무가 푸름을 알 수 있다는 뜻이다.
여름에도 겨울에도 소나무는 소나무다. 그러나 굳이 공자는 추위가 닥친 이후의 소나무를 푸르다 가리킨다. 본래 계절 없이 늘 푸른 소나무가 유독 추운 겨울에만 시들지 않고 더 푸르게 느껴지는 이유는 뭘까.
제주로 유배를 온 추사는 겨울을 겪고 있었다. 문지방이 닳도록 그를 찾던 이들의 연락은 대다수 끊긴 때였다. 어릴 적부터 남부러울 것 없이 고생이란 걸 모르고 살았던 추사에게 유배생활은 고통 그 자체였을 것으로 보인다. 유배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친구 김유근의 사망 소식을 들었고 사랑하는 아내 예안 이씨와도 영원히 이별했다. 갑작스러운 인간관계의 단절 속에서 그에게 벗은 오직 책뿐이었다.
오늘날 문인화의 정수로 꼽히는 세한도는 이 같은 추사의 추운 시절을 그린 그림이다. 세한이란 음력설을 전후로 연중 가장 추운 절기를 뜻하는데, 허름한 집 한채와 나무 네그루가 전부인 그림 속에는 황량한 유배지에서 느낀 추사의 고독이 그대로 담겨있다. 여백이 많아 더 쓸쓸하고 춥다. 그가 매일 맞닥뜨린 외로움과 고독이 이와 같았으리라. 허름한 집은 초라해 보이기도 하지만, 반듯한 목선으로 그려져 꿋꿋이 역경을 견디는 선비의 의지를 느끼게 한다는 평가다. 하늘 위로 팔을 쳐든 잣나무 두 그루에서는 희망의 메시지마저 느껴진다.
세한도에 담긴 것은 쓸쓸함과 고독, 역경을 이기는 추사의 의지만이 아니다. 집을 감싸 안은 소나무는 그 가운데서도 늘 한결같이 자신을 대하는 벗이 있음을 드러낸다. 추사의 제자 우선은 통역관으로 중국에 사신을 갈 때마다 최신의 서적을 구해 추사에게 보냈다. 경세문편 등 모두 쉽게 구할 수 없는 책이었다.
추사는 신변의 안위를 개의치 않고 자신을 대하는 우선의 한결같은 마음에 감격해 이 세한도를 그렸다. 어려운 시기에 옆에 남는 이가 진정한 벗이라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새삼 느꼈던 셈이다.
칼칼한 해서체로 화발공간에 적은 20행 295자의 편지글에서 추사는 "세상이 온통 권세와 이득을 쫓는 가운데서도 서책을 구하는 일에 마음을 쓰고, 어렵게 구한 책을 이익을 보살펴 줄 이에게 주지 않고 바다 멀리 유배돼 힘도 없는 사람에게 보냈다"며 "그대가 나를 대하는 처신이 그 전이라도 그 후라도 한결같다"고 감사를 표했다. 그는 논어 자한편에 나오는 공자의 말을 인용한 후 "그대의 태도가 가히 성인(공자)의 말씀하실 만한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적어 우선이야 말로 공자가 말한 송백과 같은 이라 칭찬했다.
추사는 한 켠에 세한도라는 제목과 함께 우선시상(藕船是賞)이라고 적어 우선을 다정히 부른 후, 장무상망(長毋相忘)이라는 인장을 찍었다. 이는 "우선은 감상하게나, 우리 서로 잊지 말자"는 의미다.
스승의 마음을 담은 세한도를 받은 우선은 감격에 겨워 답신했다. 우선은 "눈물이 저절로 흘러내리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며 "제 분수에 넘치게 칭찬을 했고 과당한 말씀"이라고 겸손함을 보였다. 또한 "제가 어떤 사람이기에 권세와 이득을 따르지 않고 세파 속에서 초연히 빠져 나올 수 있겠냐"며 "서책은 선비와 같아 어지러운 권세와 걸맞지 않는 까닭에 저절로 맑고 시원한 곳을 찾아간 것"이라 언급했다.
우선은 답신에서 이 그림을 아는 분들에게 보이고 시문을 청하겠다고 말했는데, 이듬해 청나라 문인 16인과 같이 한 자리에서 세한도를 보이고 그들의 찬문과 찬시를 받아 돌아왔다. 그는 이를 모아 10m에 달하는 두루마리로 엮어 세한도와 함께 표구해 제주에 있던 추사에게 다시 보냈다. 우선은 후에 스승 추사의 부음 소식을 듣고 지은 시 중 '평생에 나를 알아준 건 수묵화였네. 흰 꽃심의 난꽃과 추운 시절의 소나무'라고 말하기도 했다.
국보로 지정된 세한도는 잘못되고 기회주의적인 세태에 경종을 울리고 있다. 날이 추워지면 시들고 낙엽이 지는 다른 식물들과 달리, 소나무와 잣나무만은 푸름을 잃지 않는다는 점에 기인해 지조와 의리를 강조한다. 또한 어려운 시기에 바로 옆에 있는 자가 진정한 벗이라는 불변의 진리도 전달하고 있다. 지금 당신의 옆에는 그런 벗이 있는가. 당신은 누구에게 그러한 존재인가.
이후 세한도의 이동과정은 추사의 삶처럼 파란만장했다. 우선의 제자였던 매은 김병선이 세한도를 보유하다 그의 아들을 거쳐 민영휘에게, 다시 민영휘의 아들 민규식을 거쳐 일본인 후지스카에게 넘어갔다. 소전 손재형이 일본으로 가 세한도를 되찾아왔으나 자금난으로 사채업자 이근태에게, 다시 미술 소장가 손세기에게 넘어갔다. 지금은 손창근씨 소유로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돼있다.
(도움말: 현대경제연구원)
조슬기나 기자 se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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