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리더십 키워드 10-조광조의 왕도정치
"왕이 솔선수범 하라" 거침없는 진언
유배 당하자 유생 1000명이 구명운동
여진족에 속임수정책 "정도써라" 질책
[아시아경제 조슬기나 기자]정암 조광조가 1519년(중종 14년) 12월 20일 전라도 능주에서 사약을 받을 때, 그의 나이는 불과 38세였다. 1515년 관직에 올라 거침없는 개혁정책을 추진했던 젊은 선비는 5년도 채 되지 않아 기묘사화(己卯士禍)로 그 뜻을 굽혀야 했다.
시대를 앞서나간 개혁정책은 비록 물거품이 됐으나, 후학들은 그가 꿈꾸던 이상사회를 동경하며 구현해나가는 데 힘썼다. 5년도 채 되지 않는 짧은 정치적 실험에도 불구하고 그의 행보가 당대, 후대에 강력한 인상을 남긴 셈이다. 그렇게 선비는 성리학의 순교자가 됐다.
중종실록 속에 남겨진 그는 정승보다, 왕보다 정치의 중심에 있던 인물이다. 폐비 신씨 복위논쟁이 한창일 때 중종은 "조광조 한 사람의 말로 조정의 판세가 뒤집어졌다"며 놀라움을 드러냈다.
즉위 이래 역모사건에만 다섯차례 휘말린 중종은 힘이 필요했다. 성종의 둘째 아들로 연산군과 이복형제인 그는 1506년 박원종 등에 의해 추대됐다. 졸지에 왕위에 올랐으나 정국공신 책봉에 단 1명만을 겨우 추천할 수 있었을 정도로 힘이 없는 왕이었다. 기세등등했던 훈구파를 견제하기 위해서는 뛰어난 학문과 지지세력을 갖춘 조광조가 필요했다. 조광조 또한 중종과 뜻을 함께 해 조정의 위계질서를 바로하고 왕도정치(王道政治)를 구현하고자 했다.
1515년 중종이 낸 성균관 과거문제는 이와 같다. "공자께서 만약 나를 사용하는 자가 있으면 1년이면 다스림을 기대할 수 있고 3년이면 공적을 이룰 수 있다고 했다. 융성했던 옛 정치에 이르려하면 어떤 것을 먼저 힘써야 할까."
조광조의 답변은 거침이 없었다. "하나는 임금의 마음가짐이요, 다른 하나는 위임의 정치다." 그는 명도(明道)와 근독(謹獨)을 통해 황금시대를 복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여기에는 리더인 왕의 솔선수범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조광조는 이상정치의 구현을 위해 중종에게 대학과 중용 공부를 강조했다. 특히 "대학 한 권밖에 없다 해도 (왕은) 정치를 해나갈 수 있다"할 정도로 대학을 중시했다. 연산군의 폭정에 따른 시기를 겪은 그는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해서는 현자(賢者)가 군주가 돼 유교를 정치의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조광조는 신하들이 조선은 임금의 나라가 아니라 내 나라, 내 후손의 나라라는 신념을 갖고 일하게 해야 한다는 위임의 정치를 강조했다.
조광조 리더십의 핵심은 비전과 공감, 감화로 요약된다. 그는 정치를 위해서 먼저 비전을 제시하고 공감을 형성, 사람들이 이에 감화하게끔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그는 이 같은 리더십을 행동으로 직접 보였다. 이 때문에 유생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고 국민들부터 대중적 인기를 얻었다. 조광조가 유배를 당하자 한성부 향도들이 들고 일어나고 1000명이 넘는 유생들이 구명을 요구했을 정도다.
조광조는 소통에 능한 자였다. 뜻을 함께 하는 사람, 즉 자신의 사람이 있었다. 이로 인해 붕당을 만들었다는 혐의를 쓰기도 했으나 김정, 한충 등과는 죽기까지 우정이 변치 않았다고 전해진다.
또한 조광조는 정도를 걷는 이였다. 여진족 추장이 게릴라 전법으로 함경도 백성을 괴롭힐 당시 조정에서는 마찬가지로 속임수로 대응할 것을 논했다. 이 때 조광조는 "조정에서 추한 한 오랑캐를 잡는데 눈이 어두워 도적의 꾀를 부리는 것이냐"며 "눈 앞의 작은 적을 없애는 데 눈이 어두워 많은 오랑캐를 저절로 항복시킬 큰 기틀을 깨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지도자가 꾀를 부리기 시작하면 큰 틀이 깨지고, 그 아래 사람들도 정도를 따르지 않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그러나 34세에 대사헌이라는 자리에 오른 조광조는 불같이 조급한 성정이 문제점으로 꼽히기도 했다. 모든 일을 끝까지 열정적으로 밀고 나갔지만, 이 때문에 반대파의 반발도 거셌다. 그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은 찬반으로 갈라섰다. "벼슬을 얻으려고 애쓰거나 벼슬을 잃을까 걱정하는 무리들이 중요한 자리에 설 수 없게 돼, 겉으로는 칭찬하나 속으로는 욕했다"고 할 정도였다.
결국 조광조는 기묘사화로 사약을 받게 됐다. 1519년 중종은 남곤, 심경, 홍경주 등과 함께 '사사로이 붕당을 지은 죄'로 조광조와 김정, 김식, 김구 등 4명을 주범으로 몰았다. 20~30대의 젊은 정치가들은 며칠도 되지 않아 각지로 유배됐고 대다수는 사약을 받았다. 이후 낡은 정치가 재연되자 선비들은 새로운 조광조의 출연을 기대했다.
사실여부는 확인되지 않으나 지금까지 전해지는 조광조의 마지막은 이와 같다. 사약을 받은 조광조는 먼저 죄명을 물었다. 그러나 서울에서 내려온 금부도사가 갖고 있던 명령서에는 죄명이 없었다. 조광조는 "당장 상소를 올려 바로잡아야 할 일이지만, 내 자신의 이익에 관한 일이라 그만둔다"고 말했다. 이어 사약을 마시기에 앞서 "나라님 사랑을 아버지를 사랑하듯 했고, 나라일 걱정을 내 집안일처럼 했다. 밝은 해가 세상을 내리쬐니, 밝게 비춰 내 마음을 알 것이다"라 읊었다.
조광조의 개혁은 왜 실패했을까. 대다수 사람들은 시대를 앞섰다고 평한다. 율곡 이이는 조광조가 학문이 완숙되기 전에 뛰어들어 과감한 개혁을 추진했고, 시기 또한 성숙하지 못했다고 언급했다. 또한 그의 실패는 당시 보수와 현실정치의 벽이 얼마나 높았는지를 드러내는 단면이기도 하다.
반면 조광조 4년 천하에는 리더가 가장 경계해야할 덫도 나타난다. 조광조가 주장한 개혁 중 하나인 소격서 폐지 논쟁 등에서는 일편단심 리더십이 갖는 약점도 드러난다. 다양하고 이질적인 사람들이 사는 현실세계에서 오직 획일화된 이상만을 강조할 순 없다는 설명이다. 이러한 순진함, 그리고 자신감이 넘쳐 결국 오만함이 될 때 리더는 덫에 빠질 수 있다.
(도움말: 현대경제연구원)
조슬기나 기자 seul@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